[김윤찬의 역사 문화 탐방] 암행어사 출도야!
- Photo News / 김윤찬 기자 / 2026-10-06 07:59:01
백성의 눈물을 닦아준 영재 이건창(李建昌)을 찾아서
[욜드(YOLD)=김윤찬 기자]매서운 바람이 불던 조선 후기, 탐관오리의 횡포에 신음하던 백성들의 한숨을 거두어준 이가 있었다. 민간인으로 위장해 팔도를 누비며 부패를 척결했던 암행어사(暗行御史)이자 강화학파의 거두였던 영재(寧齋) 이건창(1852~1898)이다. 약 143년 전, 혼란기 속에서 빈민을 구제하고 강직한 애민 정신을 실천한 그를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스스로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곳곳에 남아있다.
흥미로운 점은 전국에 세워진 다른 비석들과 달리, 이 비석에는 숨길 암(暗) 자가 빠진 '행어사 이공건창 영세불망비(行御史李公健昌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지역에서는 신분을 당당히 드러내고 백성들의 고초를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즐거운 사학적 추측을 해보게 된다. 1883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홍수에 휩쓸려 사라졌다가, 1979년 향토사학자에 의해 발견되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발길은 인천 옹진군 북도면 모도(茅島) 마을로 향했다. 섬마을 도로 옆, 소박하지만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도 암행어사 불망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 비석은 1885년(을유년) 6월에 건립되었다.
비의 주인공인 이건창은 백헌 이경석의 형인 석문 이경직의 후손으로, 정치와 학문에서 굵직한 위치를 차지했던 명문 전주 이씨 집안에서 1852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개성이지만 조상 대대로 강화도에서 살아왔다.
다섯 살 때부터 문장을 지었을 만큼 타고난 천재였던 그는 고종 3년(1866년) 불과 15세의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했다. 나이가 너무 어려 바로 등용되지 못했을 정도다. 고종 11년(1874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며 이름을 떨쳤고, 이듬해 충청우도 및 경기도 암행어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26세부터 본격적으로 횡포를 적발하고 백성을 구제하며 조선 후기 가장 유명한 암행어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의 뿌리와 마지막 흔적은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에 위치한 그의 생가에는 '명미당(明美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그의 기품을 대변해 주고 있다.
서울 송파구와 인천 모도, 그리고 그의 숨결이 남아있는 강화도 현장이다.
백성의 고초를 온몸으로 껴안은 송파 장터의 '행어사'
가장 먼저 발걸음을 향한 곳은 서울 송파구 송파1동 송파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송파근린공원이다(KakaoTalk_20261003_121827345.jpg). 공원 한편에는 1925년 큰 장마 피해를 기록한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와 나란히 서 있는 '이건창 영세불망비'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흥미로운 점은 전국에 세워진 다른 비석들과 달리, 이 비석에는 숨길 암(暗) 자가 빠진 '행어사 이공건창 영세불망비(行御史李公健昌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지역에서는 신분을 당당히 드러내고 백성들의 고초를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즐거운 사학적 추측을 해보게 된다. 1883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홍수에 휩쓸려 사라졌다가, 1979년 향토사학자에 의해 발견되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발길은 인천 옹진군 북도면 모도(茅島) 마을로 향했다. 섬마을 도로 옆, 소박하지만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도 암행어사 불망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 비석은 1885년(을유년) 6월에 건립되었다.



비의 주인공인 이건창은 백헌 이경석의 형인 석문 이경직의 후손으로, 정치와 학문에서 굵직한 위치를 차지했던 명문 전주 이씨 집안에서 1852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개성이지만 조상 대대로 강화도에서 살아왔다.
다섯 살 때부터 문장을 지었을 만큼 타고난 천재였던 그는 고종 3년(1866년) 불과 15세의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했다. 나이가 너무 어려 바로 등용되지 못했을 정도다. 고종 11년(1874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며 이름을 떨쳤고, 이듬해 충청우도 및 경기도 암행어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26세부터 본격적으로 횡포를 적발하고 백성을 구제하며 조선 후기 가장 유명한 암행어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의 뿌리와 마지막 흔적은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에 위치한 그의 생가에는 '명미당(明美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그의 기품을 대변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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