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 말은 사라져도 글은 남는다
- 박정하 일상과생각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10-13 16:40:32

‘말은 공기 중으로 사라지지만 글은 남는다.’
영화 <말모이>는 이 문장이 지닌 의미를 전혀 다른 깊이와 차원에서 보여주었다. 한 사람의 기억 속에 남은 언어의 아름다움을 넘어, 한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애썼던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였다. 영화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대다. 우리말 사용마저 억압받던 시절, 조선어학회 사람들은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영화는 실제 사전 편찬 활동을 바탕으로, 글을 모르는 극장 심부름꾼 김판수와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의 만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은 전국 각지의 말을 모으는 일이다. 지역마다 다른 말씨와 사투리, 사람들의 입에 자연스럽게 붙어 있던 정겨운 표현들. 누군가에게는 그저 일상에서 쓰는 말이었겠지만, 그것을 모으는 사람들에게는 단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언어의 조각들이었다. 한 사람의 말은 작고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그 말들이 모이면 한 지역의 숨결이 되고, 한 민족의 기억이 된다. 그렇게 모인 말들이 마침내 ‘사전’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다. 누군가는 말을 모으고, 누군가는 그것을 기록하며, 또 누군가는 원고를 지킨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 몫의 한 걸음을 보태야 비로소 하나의 큰일이 이루어진다. 우리말 사전도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름난 학자들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일상에서 쓰는 말을 보태고, 함께 기록하고, 끝까지 지켜낸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었다. 영화는 그 과정에 드리운 위협과 희생도 보여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사전 원고를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과 글이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일깨운다.

영화를 보며 새삼 생각했다. 40년 전 빈에서 하이네의 시를 우리말로 낭송하고, 오늘 내 삶과 생각을 한글로 적어 남길 수 있다는 것.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날 빈에서 한스 호터 교수는 우리말의 소리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통해 평생 사용해온 언어를 새롭게 들었다. 그리고 영화 <말모이>는 그 아름다운 말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고 기록해온 사람들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말은 공기 중으로 사라지지만 글은 남는다. 글이 남아 있기에 우리는 오래전 누군가의 생각을 읽고, 그리움을 느끼고,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기록해 누군가와 나누는 일, 그 작은 나눔이 누군가에게 온기로 전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마음을 담아 한글로 글을 쓴다. 내가 누리는 이 고운 말을,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건넬 수 있기를 바라면서.
[ⓒ 욜드(YOLD).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