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 『파과』 속 ‘조각’을 읽다

Column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07-13 05:52:20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구병모 작가의 신작 『절창』의 마지막 장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문장들은 베인 상처처럼 서늘한 여운을 남겼다. 처음엔 제목을 보고 훌륭한 노래(絶唱)를 떠올렸지만, 읽고 나니 그것은 몸에 새겨진 상처(切創)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오늘 문득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이 신작보다는, 예전에 읽었던 작가의 또 다른 소설 『파과』 속 주인공 ‘조각’에 대한 것이다. 그녀를 통해 세월 앞에서 무너지는 육체와, 그 틈을 채우는 어른의 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차가운 킬러로 살아온 ‘조각’에게 늙음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파과』는 한때 전설로 불리던 노년의 여성 킬러가 쇠락한 몸으로 마지막 싸움 앞에 서는 이야기다. 더 이상 날카롭지 않은 감각과 무뎌진 몸은 그녀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그 균열은 동시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틈이 된다. 육체가 마모되고 단단했던 껍질에 금이 가면서, '조각'은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알아차린다. 평생 외면해 왔던 온기와 슬픔이 그 틈을 통해 스며들고, 무뎌지지 않으려 애써 왔던 심장은 그제야 조용히 반응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흔히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어른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살아보니 생물학적인 노화와 정신적인 성숙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것 같다. 단순히 세월의 무게를 견뎠다고 해서 모두가 어른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강해지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 틈으로 타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젊은 시절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단단한 벽을 쌓는다. 하지만 『파과』의 주인공 ‘조각’이 보여주듯, 나이가 들면 그 벽엔 어쩔 수 없이 균열이 생긴다. 시력은 흐려지고 세상과 맞설 힘도 약해진다. 대신 그 약해진 틈은 타인의 아픔이 드나드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내가 아파본 적이 있어야 남의 상처가 보이고, 내 삶이 유한하다는 걸 알아야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도 비로소 실감하게 되니까.

타인의 슬픔을 내 안으로 조용히 통과시키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우고 싶은 ‘어른의 문법’이다. 늙는다는 건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상실이 아니라, 나를 조금씩 비워 그 자리에 타인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조각'이 날카로운 칼날 대신 연민을 선택했듯, 나 역시 신체의 쇠락을 아쉬워하기보다 그 빈틈으로 들어올 누군가의 삶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촘촘한 그물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지만, 낡아진 그물 사이로는 바람과 햇살, 그리고 타인의 눈물도 통과할 수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조각'처럼, 날이 무뎌진 뒤에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얼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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