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추석

박정하 일상과생각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10-02 09:29:06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추석 연휴의 마지막 저녁이었다. 이틀 전 아이들이 다녀간 풍경이 벌써 오래전 일처럼 떠오른다. 두 아들 내외와 다섯 살 손주가 와서 함께 점심을 먹고, 송편을 나누며 한바탕 웃다가 돌아갔다. 늘 그렇듯 우리 집은 명절이라고 해서 크게 격식을 차리는 편이 아니다. 대신 우리 집 명절을 채우는 건 꽃이다. 아내는 식구들의 생일이나 명절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남대문 꽃 시장에 들러 꽃을 한 아름 사 오곤 한다. 이번에도 식구 수대로 작은 꽃다발을 만들고, 시들까 봐 이틀 동안 정성껏 물을 갈아주며 돌봤다. 그리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정성스레 쓴 카드와 함께 하나씩 손에 쥐여 주었다.


"이제 각자 집에 가서 편히들 쉬어."

그 다정한 한마디가 우리 집 명절의 마지막 인사다. 우리 부부에게는 오래된 원칙이 하나 있다. 아이들이 오면 부엌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하는 것이다. 명절에 와서 음식 하고 설거지나 하다 가는 게 다라면, 시집에 오는 길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메뉴는 늘 단순하지만 근사하게, 한국식과 서양식을 적당히 섞어 차린다. 사실 나는 요리하는 걸 꽤 좋아한다. 젊은 시절 SBS <남편은 요리사>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전력도 있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당시 방송에 나갔던 출연자들의 요리를 모아 낸 책에도 내 이름과 사진이 번듯하게 실려 있으니 확실한 증거다. 

 

이번 추석 메인 요리는 큰 사부인께서 보내주신 한우로 만든 '미카엘 표 스테이크'였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미디엄으로 구워내고, 아스파라거스와 마늘, 방울토마토와 파인애플을 가니시로 곁들였다. 소스에는 꿀과 레몬즙, 그리고 나만의 비밀병기인 아몬드 가루를 더했다. 거기에 아내가 끓인 시원한 소고기뭇국과 작은며느리가 가져온 제주 보리 열무김치가 어우러지니 훌륭한 명절 상이 완성되었다. 와인 잔이 서로 부딪치며 "메리 추석!" 하고 챙그랑 울리는 소리도 이제는 우리 집 명절의 익숙한 모습이다.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아이들이 우리 집을 진심으로 편안하게 여겨준다는 점이다.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와 맥주나 와인을 기울이며 마음 놓고 수다를 떨고, 집을 나설 땐 자연스럽게 허그를 나눈다. 물론 나와도 따뜻하게 서로를 안아주고 돌아간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신기해하며 부러워한다. 어떤 친구는 며느리 손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오히려 나는 그 말이 더 낯설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관계는 예법보다 다정한 마음이 먼저인 법이다.

식구들을 보내고 소화도 시킬 겸 중앙박물관 마당을 가로질러 가족공원을 한 바퀴 걸었다. 가을바람을 맞고 집으로 돌아오니 거실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와 있었다. 젊은 날의 명절은 늘 달랐다. 고향 가는 길은 끝없이 막혔고, 평소보다 두 배는 걸려 도착하면 뒷좌석의 아이들은 지쳐 잠들어 있곤 했다. 그때는 명절이란 원래 그렇게 고되고 북적여야만 하는 건 줄 알았다. 반드시 온 집안이 모이고, 음식을 수북하게 차려내야 제대로 된 날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평소에도 자주 만나며 안부를 전하지만, 명절에 다시 모여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고 손주의 맑은 웃음소리를 남겨둔 채 각자의 일상이라는 안전한 처마 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 아픈 사람 없이, 다투는 사람 없이, 계절의 길목에서 반갑게 얼굴을 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 다정한 순환이야말로 나이가 들수록 더없이 선명해지는 삶의 축복이다.

창밖을 보니 며칠 사이 차오르던 가을 하늘이 어느새 어스름 속으로 천천히 물들어 가고 있다. 거실 구석에는 손주가 가지고 놀다 두고 간 작은 폴리스카 한 대가 그대로 놓여 있다. 그 장난감을 바로 치우지 않고 하룻밤 그대로 둔다. 우리는 늘 무언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날만을 기억하며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대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수많은 날들이었다. 가족이 무사했고, 밥이 따뜻했으며, 창밖의 계절이 제때 지나가주던 그 평범한 하루들. ​나중에 오늘을 그리워하기 전에, 아이들이 다녀간 뒤 조용히 이어지는 이 평화로운 저녁의 얼굴을 오래도록 눈에 담아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추석.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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