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 박정하의 일상과 생각 / 당구공으로 시작된 플라스틱의 시대

Column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01-22 17:03:14
▲photo/ PIXABAY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나이가 들며 일선에서 물러나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나자, 뜻밖에도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 덕분인지 젊은 시절보다 오히려 친구들 간의 만남은 더 잦아졌다. 모임은 대개 취미가 비슷한 이들끼리 자연스레 갈라진다. 그중에서도 당구는, 젊은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며 지금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이자 레크리에이션으로 여전히 인기가 높다. 평소에는 점잖기만 한 친구들이 당구장에선 샷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탄성을 지르거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정겹고 재미있다.

얼마전, 테이블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당구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때 ‘꿈의 물질’이라며 찬사를 받던 저 공의 재료가 어쩌다 지금은 인류의 골칫거리로 전락해 버렸을까. 최근 환경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플라스틱의 시초가 다름 아닌 당구공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17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당구가 실내 스포츠로 자리 잡으면서, 더 나은 공의 소재가 필요해졌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코끼리 상아로 만든 값비싼 당구공이었다. 상아는 단단하고 밀도가 높아 공 모양으로 깎았을 때 탄성과 내구성이 뛰어났고, 광택 또한 훌륭했다. 그러나 코끼리 한 마리의 상아로 만들 수 있는 당구공은 네다섯 개에 불과했다. 자연히 상아 당구공은 극히 희귀한 사치품이 되었고, 값도 엄청나게 비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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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접어들며 당구가 유럽과 미국 상류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당구공 재료로 쓰이던 상아의 수요 역시 급증했다. 그 결과 코끼리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미국의 당구용품 회사 ‘펠란 앤드 콜렌더(Phelan & Collender)’는 상아를 대체할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는 이에게 큰 상금을 걸고 공모를 진행했다.

그 결과 1860년대 후반, 미국의 인쇄업자였던 존 웨슬리 하이엇과 그의 형제가 최초의 플라스틱인 셀룰로이드를 발명하게 된다. 셀룰로스 질산염과 캠퍼를 혼합해 만든 이 셀룰로이드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플라스틱의 조상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플라스틱은 결국 ‘당구공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 꽤 흥미로운 역사를 지닌 물질인 셈이다. 그로부터 1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명실상부한 플라스틱의 시대에 살고 있다. 혹자의 말처럼 인류의 역사를 도구의 기준으로 나눈다면, 지금을 석기·청동기·철기에 이은 ‘플라스틱기’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언제가 다큐멘터리 영화 '플라스틱 차이나'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중국은 한때 세계 최대의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국이었다. 중국의 왕주량(王久良) 감독이 2016년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한 이 작품은 서울환경영화제를 비롯해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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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전 세계에서 수입된 플라스틱 쓰레기를 고르고, 태우고, 녹이며 살아가는 산둥성의 한 작은 마을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너무도 담담해서, 오히려 가슴이 체한 듯 먹먹해진다. 아이들은 작업장에서 흘러나온 합성세제 폐수에 오염돼 배를 뒤집고 떠오른 민물고기를 튀겨 먹고, 플라스틱을 태운 연기를 온종일 들이마신다. 일급 발암물질인 다이옥신 등 유독 물질로 가득 찬 연기다. 그들이 마시는 물은 또 어떠할까. 그 와중에 아이들의 어머니가 의자에 걸터앉아 새 생명을 낳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중국은 이후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정작 중국 내에서는 상영이 금지된 '플라스틱 차이나'가 이러한 결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조치로 한국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 세계 1위, 포장용 플라스틱 사용량 2위 국가다. 2016년 통계청 발표 기준, 1인당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은 98.2kg으로 일본(66.9kg), 프랑스(73kg), 미국(97.7kg)을 앞질렀다. 비닐봉지 사용은 특히 심각해 연간 190억 장에 이르며, 1인당 약 370장을 소비하는 셈이다. 유럽 국가들이 연간 60~70장 수준에 머무는 것과 비교하면 거의 중독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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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영이 끝난 뒤에는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홍수열 소장의 강연이 이어졌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20세기의 선물로 칭송받던 플라스틱은 이제 ‘인류의 악몽’이 되었다. 썩는 데 수백 년이 걸리는 물질이 엄청난 속도로 쌓여가고 있으니, 악몽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쓰레기 없이 산다』의 저자 비 존슨은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 만으로도 스트레스 없이 1년에 1리터 남짓한 쓰레기만 배출하며 산다. 물론 개인의 노력보다 더 절실한 것은 생산 방식의 변화일 것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미래 세대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을 해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하는 발전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자각과 실천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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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장 당구 테이블 위에서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당구공을 바라보며, 환경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비닐봉지 대신 에코백을 드는 것부

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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