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is / 1970년 11월 13일, 청년 전태일이 분신자살한 날> 1970년, 그리고 전태일

Midlife Culture / 신성식 기자 / 2024-11-13 19:28:55
"그는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했고,
그의 죽음은 노동자와 학생, 지식인들에게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스마트시니어뉴스=신성식 기자] 어느 해 치고 중요한 해가 아닌 것이 있었던가? 작년도 그랬고, 재작년도 그랬다. 국가나 개인적으로 볼 때 다 중요하고 소중한 나날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도 역시 우리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먼저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해였다. 새마을운동은 1970~80년대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은’ 가장 큰 사건이다.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 자립정신을 바탕으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고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이것이 단순한 농촌개발사업이 아니라 공장, 도시, 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운동으로 확대, 발전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가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개통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을 기점으로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까지 연결되는 경부고속도로의 총길이는 428km이며 4차선으로 노폭은 22.4m이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수도권과 영남권을 잇는 산업의 대동맥으로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이런 사건들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공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그가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사건은 그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대사건인데, 바로 ‘전태일분신사건’이다.

1970년 11월 13일, 당시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노동자였던 전태일은 23살이었다. 17살부터 이곳 평화시장 피복공장 재봉사보조로 일하던 그는 너무나 열악한 노동현실을 알리기 위해 분신자살이라는 십자가에 스스로 매달렸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생으로 대구 출신이다.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남대문 초등학교를 중퇴했으며 1965년부터 재단 보조사로 일을 했다.


당시 한국의 중소기업은 노동집약적인 섬유, 봉제, 가발 산업이 성하던 시대였다. 특히 청계천변 인근에 있는 평화시장은 이런 소규모 공장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전태일이 근무하던 봉제공장도 그런 회사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을 값싸게 채용하여 수익을 올리는 사례가 많았고, 정부의 근로기준법이 있었으나 이를 제대로 지키는 회사 역시 많지 않았고, 특히 정부에서 이를 눈감아 주고 있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을 어겨가며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가 대다수였다.  

화염에 휩싸인 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은 주변에서 나이어린 소녀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노동에 박봉의 생활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의분을 느꼈다. 그는 동료 재단사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또한 그가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해야 하는데도 회사는 이를 지키지 않고 있음을 알고 노동청과 서울특별시에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지만 번번이 묵살 당하였다. 그는 분신 하루 전 자신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실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제품(의류)에 종사하는 5년 경력의 재단사입니다. 저희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 의류 전문 계통으로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물론 근로기준법에 해당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 종업원(2만여 명)의 90% 이상이 평균연령 18세 여성입니다. 하루 15시간의 작업은 너무 과중합니다. 2만 명 중 40%를 차지하는 보조공(시다)들은 15세의 어린 사람들로, 저 착하디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여 주십시오, 근로기준법이 우리나라의 법임을 잘 압니다.”

이날 전태일은 동료들과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를 준비,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평화시장 주변에는 시위 소식을 들은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경찰들 역시 평화시장을 에워싸고 집회를 못하도록 했다.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이 공장 밖으로 나가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공장입구를 막았다. 전태일과 동료들은 요구를 외치고 시위를 주도했지만 플래카드는 경찰에게 빼앗기고, 시위 역시 경찰의 방해로 인해 결국 무위로 끝나갈 즈음 전태일은 온 몸에 휘발유를 부었다. 그리고 그는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했다. 그의 죽음은 노동자와 학생, 지식인들에게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장기집권을 꿈꾸던 박정희 정권은 이런 사태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들의 논리대로 하자면 이런 소동은 소위 ‘빨갱이’들이 하는 짓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벌써 우리의 ‘서러운 영웅 전태일’이 떠난 지 27년째다.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인데도 무척이나 멀리 느껴진다. 그러면서 요즘 H자동차노조들의 시위를 보면서 묘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참 세월의 흐름이 요사스럽다.

 

[ⓒ 스마트 시니어뉴스 욜드(YOLD).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