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 크리스티 수녀님과 ‘그뤼스 디히(Grüß dich)’

박정하 일상과생각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08-08 05:28:01
▲잘츠부르크 모짜르테움 국립음대 구관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40년도 훨씬 지난 이야기다. 기억하기로는 1981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음악 공부를 위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겨우 자리를 잡고, 낯선 도시의 공기와 언어에 조금씩 익숙해질 즈음 한국에서 오르간을 공부하러 오신 수녀님 한 분을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잘츠부르크의 한국인 유학생은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 적었던 시절이라, 타국에서 만난 동향 사람과의 인연은 그 자체로 배나 반갑고 살가웠다.

어느 날 그 수녀님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으셨다.

“박 선생님, 여기는 ‘크리스티’라는 이름이 왜 이렇게 많아요?”  

 

순간 무슨 말씀인가 싶어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네? ‘크리스티’라는 이름이 많다고요?”
 

수녀님은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씀하셨다.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보고 '크리스티! 크리스티!' 하잖아요.“ 

 


처음엔 흔한 이름인 ‘크리스티나’를 줄여 부른 걸로 오해하셨나 싶었다. 하지만 수녀님의 세례명은 분명 ‘실비아’였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본인을 ‘크리스티’라 부른다니 이상하게 느끼실 법도 했다. 잠깐 생각한 뒤에야 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수녀님이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서 들은 말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이 친근하게 주고받는 인사말인 “Grüß dich!(그뤼스 디히)”였던 것이다. 이 인사는 본래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Grüß dich Gott)”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지만, 현지 사람들은 거창한 종교적 의미를 의식하기보다 그저 자연스럽게 반가움을 전하며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 인사말을 건넨다.


독일어가 아직 낯설었던 수녀님에게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부드러운 '그뤼스 디히'가 자연스럽게 '크리스티!'로 들렸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서 덜컥 “아니에요, 그건 인사말이에요” 하고 바로잡아 드리면 순박한 수녀님이 무안해하실까 봐,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누르며 참았다. 대신 맥락을 차근차근 설명해 드렸고, 오해를 푼 수녀님도 그제야 파안대소하시며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언어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들어 있는 언어의 틀로 소리를 이해한다고 한다. 영어를 처음 배우는 한국 사람이 ‘three’를 자연스럽게 '쓰리'로 듣는 것처럼, 수녀님의 귀 역시 낯선 타국의 인사말을 가장 익숙한 우리말 소리로 바꾸어 받아들였던 셈이다.



그 일을 겪으며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늦게 익혀지는 것은 문법이 아니라 '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니, 언어는 단어를 외우는 일이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의 숨결을 익히는 일이었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을 생각하면, 잘츠부르크의 아름다운 야경이나 골목길보다 먼저 그 수녀님의 순박했던 질문이 떠오른다.

“여기는 왜 크리스티라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함께 웃고 같은 도시를 걸었던 시간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세월이 흐르며 얼굴도 목소리도 조금씩 희미해졌지만, 그날의 정겨운 해프닝만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남아 있다. 4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내 기억 속 실비아 수녀님은 아직도 잘츠부르크의 어느 골목에서 ‘크리스티’ 하고 고개를 갸웃하고 계시는데, 지금은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오르간을 연주하며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고 계실까. 오늘따라 그 시절 잘츠부르크의 바람과 함께 수녀님의 안부가 문득 그리워진다. 그렇게 '그뤼스 디히 (Grüß dich!)'는 내게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얼굴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어떤 말은 의미보다 먼저 사람을 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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