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 박정하의 일상과 생각, "토스카나의 기억, 결국 시간이라는 이름의 강물로"

Column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02-07 06:01:02

▲▲photo/ pixabay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와인의 가치를 결정짓는 두 축은 ‘빈티지(Vintage)’와 ‘테루아(Terroir)’라고 한다. 어느 해에 태어났는가 하는 시간과, 어떤 땅에서 자랐는가 하는 공간의 합작품인 셈이다. 이를 동양 철학의 언어로 풀면 각각 시(時)와 위(位)가 된다. 인생 또한 이와 닮아,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라도 때를 만나야 하고, 귀한 재목도 제 자리에 놓여야 비로소 제값을 한다.


몇 년 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을 여행하던 중, 유서 깊은 한 와이너리의 지하 저장고에서 와인 전문가의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내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병에 담긴 와인은 대체로 20~30년의 숙성을 거치며 맛과 향이 절정에 이르지만, 그 정점을 지나면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견뎌낸 와인들이 품종과 상관없이 결국 비슷한 향을 내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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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던 포도 본연의 향은 사라지고, 대신 짙은 흙냄새나 마른 낙엽 같은 향이 남는다. 색 또한 그렇다. 선명하던 레드는 옅어지고, 투명하던 화이트는 점점 짙어지며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닮아간다. 그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노년에 접어든 인간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많이 배웠든 그렇지 못했든, 삶의 황혼에 이르면 우리의 모습 또한 어느 지점에서 하나로 수렴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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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세상의 명리(名利)에 지나치게 일희일비할 필요가 있을까. 때를 얻지 못했다고 마음을 끓일 일도 아니요, 권력과 명예를 얻었다고 교만할 일도 아니다. 하늘 끝까지 오른 용은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말처럼(亢龍有悔), 오를수록 조심해야 할 뿐이다. 인생은 어쩌면 끝내 풀리지 않는 미제(未題)일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겪는 치열한 분노와 슬픔조차 시간이라는 거대한 바람 앞에서는 결국 풍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사랑했던 ‘조르바’처럼, 나 또한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살아낼 뿐이다. 결국 인생의 최종 승자는 언제나 시간이며, 우리는 그 흐름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자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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