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컬럼 - 일상과 생각 / 말이 아닌 삶으로 증명한 광복
- 박정하 일상과생각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08-15 08:27:32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오늘은 광복절이다. 며칠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어느 유명 여배우의 증조부이자 일제강점기 시절 의사였던 한 인물의 친일 논란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가족사를 들먹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시절의 의사'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또 한 사람의 의사가 떠올랐다.
“누구의 인생에나 신이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말이다. 얼마 전 이 구절을 깊이 새기게 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만났다.

1894년 무렵, 조선의 한 백정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름은 박성춘. 갓을 쓸 수도, 호적에 제대로 이름을 올릴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죽어가던 그를 찾아온 사람은 놀랍게도 고종의 시의(侍醫) 이자 제중원 의사였던 올리버 에비슨이었다. 왕의 몸을 진료하던 의사가 가장 천한 백정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치료한 것이다. 에비슨의 손에는 신분의 구별이 없었다. 그저 아픈 사람이 있었고, 의사가 있었을 뿐이다. 박성춘에게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이 있었다면 바로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에비슨이 실제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왕의 몸을 만지던 손이 백정의 몸에 닿았다는 것, 그것이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당신도 사람입니다”라는 가장 강력한 선언이었을 것이다.
병에서 살아난 박성춘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평생 '백정'이라는 이름 속에 갇혀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당시 곤당골교회(현재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에 나가 신분 차별에 맞섰고, 자신과 같은 백정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존엄을 받은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에게 존엄을 건네는 사람이 된 것이다.


몇 달 전 읽었던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속의 한 문장처럼, 정답을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에비슨은 백정을 치료하는 손으로, 박성춘은 관민 공동회의 목소리로, 박서양은 사람을 살리는 삶으로 만민 평등이라는 정답을 증명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는 나라를 되찾는 일이 광복이었겠지만, 한 사람의 존엄을 빼앗긴 시대에는 그 존엄을 되돌려주는 것 또한 광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 8월 15일에는 나라를 되찾은 기쁨뿐 아니라, 사람이 사람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꺼이 손을 내밀었던 이들도 함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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