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드(YOLD) 유성욱 기자] 개그라고도 불린 짧은 코미디 한편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국민이 함께 웃던 시절이 있었다. 개그맨 정명재는 그 시절, 혀 꼬부라진 취객 연기로 깊이 각인되며 성가를 높였던 스타 개그맨이다. ‘언니, 여기 골뱅이 하나 추가요’라는 대사 한마디로 장안의 골뱅이 가격을 들썩이게 했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시야에서 뜸하더니, 뜻밖의 근황을 하나씩 전하는 추억의 인물이 되었다. 화려했던 개그 무대 뒤편의 기나긴 인생 무대에서 한 남자가 살아가는 이야기.

KBS ‘유머 1번지’ ‘쇼 비디오자키’ 고정멤버로 활약
1980년 TBC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던 정명재는 1983년 KBS로 이적해 ‘유머 1번지’ ‘쇼 비디오자키’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당시의 개그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역 중 한명이다. 대중에게 큰 웃음을 주며 깊이 각인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의 정이사, ‘네로 25시’에서의 충신 페트로니우스가 바로 정명재가 맡았던 배역. 그가 단독으로 진행한 코너도 있었다. ‘쇼 비디오자키’의 ‘인생 스케치’라는 코너였는데, 무대에 이젤을 펼쳐놓은 채 뛰어난 그림 실력을 선보이며 웃음을 선사한 새로운 영역의 코미디였다.

그렇게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인기 개그맨으로 활동했는데, 대표작 하나를 뽑으라면 아무래도 최양락, 임미숙 등과 함께 꾸몄던 로마시대 배경의 풍자 코미디 ‘네로 25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애초 그 코너에서 주목받는 개그맨이 아니었다. 그가 맡은 배역은 페트로니우스라는 충신 캐릭터였는데, 개그 코너라는 특성상 충신 역할이 웃음을 전달하기는 어려운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구조에서 ‘취객 연기의 달인’이라는 칭호와 함께 반전을 이룬다. 지금까지 그만큼 리얼하게 술 취한 연기를 하며 웃음을 준 연기자를 찾기 어렵기에 ‘취객 연기의 1인자’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잠시 그의 입을 빌어 당시의 사연을 회고해보자.

“처음 그 역(페트로니우스)을 맡았을 때 솔직히 불만이었습니다. 배역을 맡아도 참 더러운 역을 맡았다고 생각했죠. 그도 그럴 것이 개그맨이라면 당연히 웃겨야 뜨는데, 충신 캐릭터로는 웃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코너 진행 내내 내뱉는 대사라고는 고작 ‘폐하 아니되옵니다’ 밖에 없는데 어떻게 웃길 수가 있겠어요. 대사가 좀 더 길어봤자 단어 몇 개 얹어 ‘폐하께서는 로마의 앞날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정도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요.”

힘들게 로마시대 분장을 한 채 짧은 대사 하나만 맡은 채 우두커니 서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에게 우연찮게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코미디 하이웨이’라는 다른 프로그램의 녹화 대기실에서 동료들과 농담하며 넋두리하는 모습을 ‘쇼 비디오자키’의 담당 PD가 우연히 엿보게 된 것이다. 먼저 정명재가 만취한 여자 목소리로 말은 던진다.

 

(정명재) 개그맨 아저씨들, 나 이런 데 있다고 깔보지마~
(상대방) 깔보긴 누가 깔봐, 아가씨 많이 취했구만.
(정명재) 그래 나 많이 취했다. 소주 두병 깠지, 또 양주 큰 거 두병 깠지, 또 맥주 두병 깠지...오빠, 미안해~ 자꾸 까는 소리만 해서.

술 취한 여인에 대한 관찰력은 학창시절 쌓여진 것이다. 고등학교 당시 자신의 집에 세 살던 부부가 있었는데, 일용직이던 남편이 매일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고, 아내 역시 술 한잔 걸치면 자신의 신세를 고등학생이던 정명재에게 하소연하곤 했다고 한다. 그때의 분위기가 ‘네로 25시’에 그대로 투영되었던 것. 

‘네로 25시’ 충신의 취객 연기 대 폭발!
대본이 바뀌었다. 대망의 ‘네로 25시’ 녹화날. 여느 때처럼 충직한 말만 골라서 하는 정명재가 네로 황제 역할의 최양락에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충언을 한다.

“폐하 아니되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로마 시민을 우롱하는...”

대사가 끝나기 전에 네로가 뒷통수를 내리치며 핀잔을 준다.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마, 재수 없어, 나가 마!”

정명재가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간다. 술 취한 명분을 주기 위한, 평소와 다른 연출이었다. 그리고 다시 콩트가 이어지려고 하는 찰라에 빨갛게 코가 삐뚤어진 정명재가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폐하~”
“아니, 페트리우스 왜, 왜 그래?”
“보면 몰라! 나 한잔 꺾었다. 왜, 아니꼽니~ 사람이 그러는 게 아냐!”
“미쳤구나, 페트리우스”
“그래 나 미쳤다. 니가 잘나서 왕 됐냐, 부모 잘 만나서 왕 됐지, 당신 나 깔보지 마! 나도 내 동생, 학교 졸업하면 이 생활 땡이야.”

로마 황제가 어이없어 하며, 달래듯이 묻는다.

“페트리우스 도대체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아, 우리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갑자기 아버지가 왜 원망스러워, 임마~”
“우리 아버지가 슈퍼마켓 망하지 않았으면, 내가 왜 니 밑에 있니!”
“뭐, 니, 니 밑에.”
“그럼 내가 니 밑에 있지, 니 위에 있니? 아 술 댕겨, 언니 여기 골뱅이 하나 추가해줘요.”

진짜로 술 마시고 연기하는 것 같다는 호평과 함께 단박에 반응이 왔다. ‘내 동생 학교 졸업하면 이 생활 땡이야’와 함께 ‘언니, 여기 골뱅이 하나 추가요’가 유행어로 뜨며, 장안의 골뱅이 안주 품귀현상과 함께 골뱅이 통조림 가격이 오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연예계 입문 이래 처음으로 CF까지 찍었다. 롯데제과에서 나온 블랙블랙 껌 광고였는데, 졸리울 때 씹는 껌이라는 컨셉이었다. 술 취해 운전대 잡는 부분이 심의에 걸려 음주 연기 더빙을 다시 해야 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기러기 아빠’ 30년, 식당 운영으로 뒷바라지
개그맨으로서의 인기는 1990년대로 이어졌다. 엉터리 중국어 연기로 주목받기도 했으며, 상당한 수준의 그림 재능을 살려 만든 개그 코너 ‘인생 스케치’가 인기를 끈 것. 여자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다가, 그림이 틀리면 모델에게 똑같이 먹칠을 해서 웃음을 주는 식이었다. 그림 개그의 성공으로 두 번째 CF도 찍었다. 이번엔 해태제과, ‘파시통통’이라는 아이스크림 광고로 그림 속의 아이스크림 먹는 여자 모델이 그림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아이디어와 콘티까지 정명재가 직접 짰다고 한다.

그렇게 잘 나가던 개그맨 정명재가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과 마주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1995년 이벤트 회사를 차렸는데, 1997년 IMF를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접게 됐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개그계에도 세대 교체 바람이 일며 무대에 자신이 설 빈공간이 보이지 않게 된다. 정명재는 여의도를 떠나 경기도 고양으로 이사했다. 고양경찰서 인근 지도공원 앞에 ‘네로 25시’라는 생고기 전문점을 차렸다. 직접 고기를 손질하며, 손님상을 돌며 유쾌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띄워 지역에서 꽤 명성이 높았다.

2년여 전 과거 스타의 오늘날을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되며 그 사연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정명재가 식당을 내게 된 데는 사실 가슴 아픈 배경이 숨어있다. 1995년 아내와 아들 딸, 꼬맹이 두 아이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 그런데 IMF로 운영하던 이벤트 회사를 접은 데다가 방송 일마저 뜸해지니, 자녀들의 유학 비용과 생활비 마련에 어려움이 닥쳤다. 게다가 환율까지 천정부지로 치솟은 상황. ‘기러기 아빠’로 수년을 고깃집 운영에 매달렸다. 집과 가게만을 오가며 밤 늦게까지 일에 빠지고, 일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서는 외로움에 빠지는 정명재를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바라봤다.

본인도 더는 견딜 수 없어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갈 생각에 운영하던 식당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코로나로 옴짝달짝 못하게 된 상황이 됐다. 사실 미국에 갔다고 해도, 지인 하나 없는 곳에서 영어도 안 되니, 버틸 자신이 없기도 했다고. 결국 그는, 2020년 집 근처에서 새로운 식당을 열었다. 이번엔 ‘네로 25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명마루’라는 식당이다. 테이블이 6개 남짓. 국내산 생고기와 함께 쭈꾸미와 제육볶음, 코다리 안주를 내놓는다. 계란찜도 맛있다고 자랑한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옛날에는 잘 나갔는데 우울증이 오지 않냐?’고 묻는 손님도 있어요. 그런데, 가게가 작은 게 장점이 많아요. 일단 망해도 별로 까먹을 게 없다는 점이죠. 지금은 미국에 학비를 보낼 부담이 없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살려고만 합니다.” 

인사동에서 전시회 가지며 화가 정식 데뷔
명마루는 개그맨이 운영하는 식당이니만큼 유쾌함을 많이 주는 식당이었다. ‘고양시를 발칵 뒤집어 놓은 맛집’이라는 식당 입구의 ‘자뻑’ 문구와 함께, 익살 넘치는 글귀와 소품이 가게 곳곳에 즐비하다. 식당에 들어서면 세계 생고기 조직위원장 Mr.막드슈가 수여한 표창장이 보인다.

“명마루 정명재. 위 사람은 평소 투철한 책임감과 건전한 사업정신으로 타의 모범이 되었음은 물론 마약밀매, 하우스방, 또는 불법 성인 사이트 등을 운영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숱한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인류의 건강증진을 위하여 음식점을 선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성을 담긴 식사와 질 좋은 고기를 사용함으로써....” 

막걸리는, 그가 직접 그린 복돼지와 여인의 나신이 각각 새겨진 양은주전자에 따라마실 수 있다. 복권을 샀을 때 복돼지 주전자를 선택하고, 외로운 사람들은 여인의 주전자에 손넣고 술을 마시란다. 메뉴판에는 국제삼겹살연맹이 권하는 인기메뉴인 삼겹살 정식과 뒷고기 정식(각각 1만7천원)이 적혀있고, 술안주로는 세계보건기구(WHO)가 권하는 제육볶음안주+계란찜(2만6천원), 쭈꾸미안주+계란찜(2만6천원), 코다리안주+계란찜(2만5천원)을 추천한다. 한눈에도, 저렴한 가격에 한 잔 하기에 딱이다. 인터뷰 중 단골인 듯한 손님 한분이 제육을 주문한다. 소맥 한잔 곁들이며 인터뷰를 하던 주인장이 벌떡 일어나 상추 바구니를 손에 쥐고 손님상으로 간다.

“상추밭에서 키운 상추입니다.”
“상추를 직접요?”
“아니요, 키우는 사람이 키운...” 

 

 

실 없는 유머에 자지러진 손님상을 뒤로하고 돌아왔다. ‘네로 25시’에서의 리얼한 주당연기에 대해 묻고 답하던 차였다.

“저를 굉장한 술꾼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사실 술을 즐기기는 하지만,한달에 1~2번밖에 안 마시구요, 저만의 음주 철칙도 있습니다. 낮술을 마시지 않고, 혼자서는 안 마십니다. 특히 속상할 때는 술을 멀리 하죠.”

술 연기로 떴고, 술 팔아 먹고사는 사람치고는 조금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렇다면, 결혼 10년만인 1995년 가족을 머나먼 미국으로 떠나보낸 30년 기러기아빠는, 무엇으로 기나긴 허전함을 달랬을까.... 식당일과 함께 그의 삶에 버팀목이 되어준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그림이다. 취미를 넘어 초대 개인전까지 개최한 화가로서의 삶이 그의 또 다른 모습이다.

 

마지막 꿈은 연기자로서 감초 역할 취객 연기
정명재가 개그 프로그램과 CF에서 선보인 그림 실력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개그맨이 되기 전 독학으로 디자인을 배워, 공모전에서 장관상도 몇 번 수상했다는 이력의 정명재는 지난 2021에도 자신의 재능이 여전한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전라북도에서 주최한 인권공모전에 작품을 출품, 최우수상인 전라북도지사상을 수상했었다고 밝힌다.

당시 정명재는 30cm 자 위에 남자와 여자, 할머니, 장애인 등을 그려넣고 ‘잣대를 놓고 보면 인권이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카피를 달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고. 그 작품은 캘린더로도 만들어져 집에 왔다고 한다. 단골 손님들의 생일에 그림을 그려주는 식당주인으로도 소문난 정명재가 정식 화가로의 입문하는데 징검다리가 되어준 이는 압화(꽃과 잎을 눌러서 말린 그림)로 유명한 도주현 작가다.

정조대왕 관련 방송촬영을 위해 수원에 갔다가 도주현 작가를 만나게 됐는데, 정명재의 작업을 보고는 본인과의 2인전을 제안해 2023년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정명재×도주현 크로스오버 전’을 개최하게 된 것. 지난해 9월에는 첫 단독 개인전도 가졌다. 인사동 마루아트센터 초대로 ‘어디쯤 왔을까?’라는 주제로 틈틈이 준비한 수묵화와 캘리그라피 작품들을 선보인 것.

“스승도 제자도 없습니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지요. 그러다보니 재료 사용이 제일 난감한 과제였는데, 그런 면에서 유튜브가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현재 저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은 그림 그리고 있는 혼자만의 시간입니다.”

 

일하고 있는 식당 가까운 곳에 개인 화실도 마련했다. 퇴근 후나 집에 있다가도 홀로 상념에 빠질 때면 지체없이 화실로 가서 붓을 잡는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인사동과는 인연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소중한 인연, 그리고 내 그림을 사랑하는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화선지와 캠퍼스 위를 걷고, 지칠 무렵이며 붓을 꼭 끌어안고 단잠에 빠집니다.”

정명재의 작품은 가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유난히 많다. 가족과의 즐거운 나들이, 행복했던 순간을 담아낸 작품을 보다보면 평생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아내와 아이들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그렸던 비운의 화가 이중섭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정명재의 희망은 그림 속에만 담겨 있을 뿐,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는 체념한 상태다. 학업을 마친 자녀들은 현지에서 직장을 갖고 각자 자신의 삶을 산다. 한국에 같이 있었어도 어차피 떠날 아이들이라고 위안하며, 이따금 전하는 소식에 만족한다. 대신 새로운 꿈 하나가 생겼다.

 

기회가 닿는다면, 연기가 하고 싶어졌다. 개그가 아니라 연기다. 자신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가령 포장마차 주인과 같은 역할. 쭈뼜쭈뼜한 연인이라든지 연예인이 왔을 때 술 취한 목소리로 서빙하며 ‘둘이 사귀시나요’ ‘잘 어울리네요’라며 극의 감칠맛 역할을 하는 배역말이다. 굳이 전례를 들자면, ‘한지붕 세가족’의 최주봉이랄까? 그렇게 무대에서 내려온 정명재는 우리 주변에서 작은 꿈을 꾸며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writer 유성욱 photo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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