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Interview / 용인 발전의 산증인 이우현 전 국회의원, ‘우정과 의리는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 말하는 이유

Interview / 유성욱 기자 / 2025-11-09 09:33:10

[욜드(YOLD)=유성욱 기자] 1957년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 잇지 못했다. 모두가 힘겨웠던 시절이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게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으니...그랬던 그가 인구 110만 용인특례시의 발전을 10년 이상 앞당겼다고 자부한다. 신산(辛酸)의 어린 시절마저 추억과 낭만으로 기억될 만큼, 모멸찬 옥고(獄苦)를 마치고 다시 고향의 벌판에 선 이우현, 그는 지금 무엇을 꿈꾸는가? 그가 남자의 우정과 의리를 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 했던 용인 흑수저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스승이기도 한 정현종 시인은 사람의 존재와 인연에 대해 이렇게 의미심장한 시 한편을 남겼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방문객‘ 중)

한 사람에 대해 논하고 이야기한다는 것 역시도, 간단하거나 쉬운 일은 아니다. 커다란 존재감을 과시했던 사람이거나, 혹 문제적 인물이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럴 때는 일단 누구도 부인할 수밖에 없는 팩트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오랜 세월 ’방문객‘들을 관찰해왔던 기자로서 더 없이 옳은 방법이라고 믿어왔다. 

 

용인사람 이우현,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시절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다. 1957년 용인군 원삼면(현 용인특례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초등교육은 집에서 멀지 않은 좌항초등학교에서 받았으나,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계속 잇기가 힘들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야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그런 시기였다. 그나마 운동신경이 있어 공을 좀 찼던 게 학업을 이을 수 있던 계기가 됐다. 학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상황에서, 장학생을 시켜준다는 제안에 이끌려 인천시 소재 선인중학교 축구부에 몸담았다. 이후 축구로 이름났던 영등포공업고등학교로 스카우트 되기도 했지만, 어려웠던 집안형편으로 더 이상의 도움을 받지 못해 끝내 학업을 포기하고 1975년 하사관 118기로 해병대에 지원 입대한다.


1978년 해병대 만기 전역 후에는 스물두 살의 젊음을 만끽하는 대신 생계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길거리 수박장사를 시작으로, 분식점, 레스토랑, 자동차 정비공장, 제조업, 도매업 등 13가지 생업을 이으며 20년 세월을 쏜살같이 보냈다. 밑바닥 생활을 시작으로 젊음을 무기 삼아 하나하나 성취를 일구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다. 

 정치인으로 용인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하다
불혹의 나이를 막 넘긴 이우현 1998년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해 당선, 용인시의회 의원으로 풀뿌리정치를 시작하게 된 것. 무소속이라는 한계도 대대로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그에게 핸디캡이 될 수 없었다.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용인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1996년 인구 20만명의 도농복합시 승격 기준을 넘기며 용인군에서 용인시로 변모한 이후에도 도시는 급속하게 성장, 2002년에 인구 50만명을 돌파했다. 현재는 인구 110만명의 특례시로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급격하게 성장하고 인구가 늘어난 도시, 얼마나 현안이 많았을까?

 

용인시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한 이우현은 임기 4년 중 후반기 2년을 용인시의회 부의장으로 도시의 발전과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앞장섰다. 그러한 이우현의 열정과 능력은 용인 시민으로부터 합격점을 받는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용인시의회 원삼면 선거구에서 무소속 후보로 단독 출마해 시의원에 당선됐으며, 4년 임기를 마친 2006년까지 용인시의회 의장으로 활약한다. 당시 용인의 수많은 현안 해결에 이우현은 지금까지도 큰 자부를 갖는다.

더 큰 꿈을 꾸었다. 2006년 집권여당이던 열린우리당에 입당,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용인시장에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신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더욱 단단해지며 내실을 다지는 시간으로 삼는다. 못다했던 학업에도 뒤늦게 도전, 2008년에는 용인대 문화관광학과를 졸업했고, 2010년에는 용인대학교에서 경영학석사 학위를 받는다.

드디어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이우현은 새누리당 후보로 경기도 용인시 갑 선거구에 뛰어들어 현역 의원을 꺾고 국회의원 타이틀을 거머쥔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용인시 갑 선거구에 출마, 재선에 성공한다. 용인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란 타이틀을 넘어, 주로 국토교통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중앙 무대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계파로는 친박으로 분류되었는데, 친박 좌장 서청원의 왼팔로 불릴 정도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곧 인생 최대의 시련이 찾아왔다. 2017년 11월 불법정치자금(공천헌금) 수수건이 불거져 검찰의 수사망에 올랐으며, 2018년 1월 정치자금법 위반 및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같은 친박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최경환 의원과 함께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그해 8월, 서울중앙법원은 징역 7년과 함께 벌금 및 추징금 판결을 내렸는데, 2019년 5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판결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이우현에게는 죽음같은 어둠의 기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넷 검색한 손녀의 질문에 밤잠 못자
정치인 이우현은 2023년 8월 15일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가석방된다. 옥살이 5년 8개월만이다. 2024년에는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진 것은 물론,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열리게 된 것.
최근 용인에서의 정치인생 27년을 더듬는 자서전을 쓰고 있다. 자서전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손녀딸에게서 비롯됐다. 1남2녀를 둔 이우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주가 셋이다. 그중 가장 큰 손녀딸이 초등학교 3학년. 그런데 어느날 손녀딸로부터 네이버를 검색하다가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와 사진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덜컥 하는 마음에 평소 별로 신경쓰고 있지 않던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그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손목에 수갑을 찬 자신의 사진이 버젓이 올라 있었고, 사실이 아닌 부분까지 사실처럼 적시되어 공공연하게 확대재생산 되고 있는 것이었다. 고민에 휩싸였다. 손녀딸처럼 인터넷만 검색한 사람들이 세상 나쁜 사람으로만 자신을 알 것이라 생각하니 잠도 오지 않았다. 그걸 가만 놔둘 순 없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27년 정치 인생을 더듬으며,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다소 잘못 판단하고 행한 게 있다면 솔직한 모습으로 반성하고 이해를 구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자서전 집필은 12월 중순이면 마무리돼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그런데 자서전의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우정과 의리는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 왠지 기시감이 드는 자서전 제목이 낯설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표적사정으로 수감됐던 친박연대 서청원 전 의원이 2010년 광복절 특사로 의정부교도소 문을 나서며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이었다. 당시는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였다. 변함없이 그를 믿어준 지지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멘트였고, 박근혜는 변함없는 의리로 화답했다. 출소 후 서청원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당선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다.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라는 동명의 평전이 출판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우현은 이 자서전 제목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남기려 했던 걸까? 힘겨웠던 시절 편지를 보내거나 면회 접견을 통해 위로하고 마음을 나눠준 이들에 대한 ’우정‘의 마음은 당연히 담겨 있어 보인다. 헌데 그것만은 다가 아닌 느낌을 준다. 대대로 용인에서 나고 자라고, 용인에서 27년 동안 정치활동을 펼치며, 용인과 맺은 ’의리‘를 강조하려는 마음이 엿보이는 것은 지나친 추측일까? 용인을 위해 좀더 역할이 있다고 결심한 것은 아닐까? 질문 들어간다.

적지 않은 나이에, 5년 8개월 수감생활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지금 건강은 어떠신가요?
문재인 정부가 이른바 적폐 청산에 매달렸을 당시 별건에 별건, 그리고 다른 별건 수사가 이어지며 그 충격으로 스텐스를 4개나 심어야 했습니다. 옥살이를 하면서도, 건강하게 살아 나가야만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버티었습니다. 하루 30분 열심히 걸었고, 답답한 공간이었지만, 맨몸 근력운동에도 힘썼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건강합니다.  

 

혼자만의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두 번 갈 데는 못되지만 인생공부는 잘 했습니다. 저는 이전까지 일생을 누구보다도 바쁘게만 살았는데요, 그 죽음이나 다름없었던 시간 동안 가족의 소중함과 함께 지금까지 인연 맺고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용인의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고요,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은 끊어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피해자란 생각을 갖고 계시는 거죠?
최근 서울남부지법이 카카오 김범수 창업자의 주가조작 혐의 재판에서 검찰의 별건수사를 문제삼아 무죄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당연한 판결입니다. 별건 수사로 피의자나 관련자를 압박해 진술을 얻어내는 수사 방식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검찰의 관행은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당이 분열됐고, 정치적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 역시 당시 여당 친박의 핵심으로 강한 발언을 많이 했었는데, 문재인 정부에 의해 ’적폐‘로 몰려 정치보복을 당한 게 너무도 비통합니다.
제 경우는 별건에 별건 수사가 이어지며 네 번째 별건 수사 끝에 엮이고 말았습니다. 제가 억울한 것도 억울한 거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벌어지는 이러한 악순환은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사라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서전에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들었는데요?
27년 동안 정치하며 저와 관련해 파출소에 간 주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용인에서 가장 깨끗하게 정치활동을 했던 사람 중 하나라고 지금도 자부합니다. 하지만 속죄해야 할 일도 물론 있습니다. 집에 가져가거나 개인적으로 유용한 일은 없지만, 부끄럽게도 선거 때 (불법)후원금을 받은 적 있다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사실 정상적 후원금은 사무실 임대료와 직원 월급, 현수막 등에 사용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의원회관에 찾아오는 민원인들이 엄청 많은데, 그들에게 밥을 얻어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사야하는 게 떳떳한데, 후원금으로 식사 등은 적용이 안되는 형편이라, 제가 잘못 판단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수감기간 제 정치 인생을 돌아보며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자서전에는 27년 정치활동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용인시의회 정치인으로서 어떤 점이 가장 기억나는지요? 

보람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기억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몇가지만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용인시 죽전동과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의 연결도로가 문제가 되었을 때 삭발단식을 하며 해결했던 게 떠오르고요, 용인의 낙후된 스포츠 인프라 확보를 위해 영등포공고 동문이기도 한 허정무 총감독을 모시고 원삼면에 용인시축구센터를 만들었던 것도 보람됩니다. SK반도체클러스터가 들어오며 지금은 용인 다른 곳으로 이전한 상태지요.


용인 동백지구에 연대의대 세브란스병원을 유치한 것도 큰 보람입니다. 이렇다할 대형 종합병원이 없던 용인에 큰 경사인데, 사업성 부족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제가 담판을 지으며 착공을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또한 장례식장, 화장장, 납골당, 수목장 시설을 갖춘 용인평온의숲 개장과 용인한국외국대학교부설고등학교(용인외대부고) 개교 등도 용인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시의회 의장 시절 공을 들였던 사업입니다.
 

용인지방공사도 서울 면적만큼이나 넓은 용인에서의 각종 사업을 위해 발족시킨 지방공기업이지요. 처음에 기대했던 만큼 지금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데, 좀 더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용인의 발전을 위해 달려왔던 지난 날들이 떠오르며, 더 많은 일들이 생각나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이쯤 할까 합니다. 

19대, 20대 재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셨으니, 당시의 보람됐던 일들도 주마간산처럼 스칠 텐데요?
자서전에는 제 머리에서 나와 추진했던 23가지 굵직한 성과들을 소개했는데요, 그 많은 성과 중 단 1가지를 꼽으라면 저는 서울-용인-세종고속도로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2경부고속도로(현 서울-세종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의 정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1991년부터 타당성이 검토됐는데, 무려 10조원에 이르는 재정부담으로 역대 정부에서 추진하지 못하고 있던 사업이었죠. 게다가 충청도에서는 그 예산의 일부만 들여서 중부고속도로를 10차선으로 확장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거듭하고 있었구요.


하지만 용인시의 발전을 위해 절대 놓칠 수 없는 사업이었죠. 당시 친박 핵심이던 제가 박근혜 대통령을 면담해 새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강력히 설득했는데, 다행스럽게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박 전대통령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은 셈이 됐습니다. 당시 국회에 속기록이 50여차례 남겼을 정도로 국토교통위원으로서 전력을 쏟았고, 이후 국토교통부와 한국도로공사를 수차례 방문하며 집요하게 설득해 두 개의 용인 IC(북용인(모현), 남용인(원삼))를 얻어내며 용인 발전을 크게 앞당길 수 있었던 거죠. 용인시 원삼면에 이천의 3배가 넘는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고속도로 및 원삼IC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로 인한 일자리 창출과 세수 확대 등 경제적 효과는 그야말로 엄청납니다. 

전기도 안 들어왔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참 격세지감이실텐데요. 용인이 명품도시고 나아가는데 더 필요한 조건들이 있을까요?
1등 도시가 되려면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합니다. 시의회의장 시절 외고를 유치했던 것도 그 이유죠. 서울-세종고속도로 개통으로 용인에서 세종까지 30분이면 됩니다. 세종시 공무원들도 용인에 거주하면, 서울과 세종 두 집 살림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서울로 가지 않아도 되는 초,중,고등학교가 있으면 용인이 최고의 선택지가 될 것입니다. 지금보다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문화, 예술, 스포츠 환경과 인프라도 시민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각종 시설도 보강해야 하고요, 인적 자원에도 많은 투자와 함께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용인에는 서울을 떠나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펼치는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용인에서 더 많은 활동과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용인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용인에서 태어나, 용인에서 자라고, 용인에서 컸습니다. 시민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지만, 좋지 않은 소식으로 실망도 안겨드렸습니다. 하지만 어떤 탓을 하기보다는 용인을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 그동안의 성원을 되갚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명예를 회복하고, 손자 손녀에게도 떳떳한 할아버지로 남게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남자로 살아오며 정말로 ’우정과 의리는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남자가 살아가며 가장 중요한 것도 바로 우정과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성원해준 모든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무엇보다 용인에 대한 저의 우정과 의리는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다시 서두의 시(詩) 한편을 조금 비틀어서 빌어본다. 

 

’한 사람을 기사로 남긴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의 부담이 기사를 마무리하며 가벼워졌다. 이우현이라는 정치인의 비 당파적 태도를 확인하고 나서다. 문재인 정부 당시 정치적 시련을 겪었지만, 설사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 땅에, 어떠한 보복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시의원 등 지방 정치인에게 여야가 왜 필요하냐고도 목소리 높인다. 오직 시민만 보고 지역 발전을 위해 뛰면 된다는 것. 무소속으로 오랜 풀뿌리 정치활동을 했고, 필요에 의해 나중에 여야를 두루 경험하기도 했던 지역 정치인, 그렇기에 내 편 네 편의 진영논리가 판치는 시대, 이쪽 저쪽 감안하며 애써 중심을 잡고 기사 한 줄이라도 써야하는 시대에 알고보니 이 ‘방문객’은 비교적 편안한 인터뷰 대상자였다.


그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평가는 잠시 유보한다. 지금도 용인에는 27년 정치활동을 하며 그가 남긴 여러 유산들이 곳곳에 있다. 그것을 가까이서 보고 접하는 용인 시민들이 더 잘 알아서 현명한 판단을 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상전벽해 용인의 미래는 대한민국의 미래이고 희망이기도 하다.

writer _유성욱 기자 / photo _조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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