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Meeting / YOLD Life KBS 탤런트 김명희, “살아내는 용기, 내 인생의 진짜 주인으로 서다”

Interview / 안정미 기자 / 2025-12-03 21:05:43
- 처연한 시간 이겨내고 행복의 삶 마주한 배우

[욜드(YOLD)=안정미 기자] 따뜻하고 정갈한 집에서 만난 배우 김명희는 여전히 고운 얼굴로 발그스름 웃는 모습이 예쁘고 평온해 보였다. 중년까지 지켜 온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함이 그녀의 지나온 시간들은 행복으로 채워졌을 것만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됐고, 드라마 한 편을 듣는 듯 했던 그녀의 지난 시간들은 깜짝 놀랄 만큼 생각과 달랐다. 처연하리만치 안타까운 그녀의 과거 시간들은 지금의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 원동력이 된다고. 이제 드디어 행복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는 그녀의 삶, 응원의 박수로 맞이해 본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녀의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모를 기억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아기로 세상을 마주했다. 공군 파일럿이었던 아버지는 월남전에서 전사했고,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뱃속에 아이가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을 전쟁터에서 잃은 것. 그렇게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유복자가 됐다. 할아버지의 반대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부모 아래에서 ‘사생아’라는 꼬리표는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미혼모로 그녀를 홀로 키우던 어머니마저 그녀가 3살이 되던 해 사고사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는 사실이다.

굴곡진 삶의 시작
그녀는 그 어린 나이에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곱 자매 중 넷째, 집안은 이미 어렵고 복잡한 사정으로 가득했다. ‘고아’가 돼버린 어린 그녀 역시 그런 환경 속에서 가족들의 보호를 온전히 받지 못한 채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올라온 건 8살 때였다. 이모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으며 함께 지내게 됐던 그녀. 어린 나이에 갓난아기를 업고 밤을 새운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찬밥 신세였어요.”

그녀는 담담히 말했지만, 그 어린 소녀가 감당해야 했던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한 첫 가출, 그리고 연기자의 길


“그렇게는 못 살겠더라고요. 꿈도 없고 미래도 안 보였어요.”

고등학교를 마친 뒤 재수를 하던 그녀는 결국 집을 떠났다. 공원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면서 어렵게 독립을 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한 그녀다. 이모에게 잡혀 돌아가기를 서너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기로 했다. 가출을 한 그녀는 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도 하다가 다방 DJ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방송국 시험에 도전하게 됐다. 예쁘장해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배우를 꿈꿨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낭만적으로 생각할 여력은 없었다. 그녀는 정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살기 위해 배우가 되기로 다짐하고 1982년 KBS 배우 시험에 합격했다. 그렇게 그녀에게 연기자의 길이 열렸다.

KBS와 TBS에서 연기 활동을 하며 ‘내 마음 별과 같이’ ‘토지’, ‘전원일기’ 등 다양한 작품에서 얼굴을 알렸다. 다양한 곳에서 연기자로서의 자리를 단단히 해 가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응원해 가며 그녀는 조금씩 행복을 알게 됐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려해 보이는 배우 생활은 그녀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과의 경쟁, 인맥 관리, 끝없는 자기 투자. 조용히,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만 가던 그녀에게 더 이상 화려한 배우라는 자리는 행복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그녀는 배우의 길에서 방황하다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사업가로의 변신과 결혼, 그리고 이혼까지

‘돈과 안정된 삶’이라는 목표가 명확했던 김명희. 20대 중반의 그녀는 과감하게 사업에 뛰어들었다. 부동산 전매로 자본을 만들고, 카페·커피숍을 운영했다. 목표를 향한 부지런함과 결단력으로 20대에 이미 아파트 두 채를 마련할 정도로 사업 수환이 좋았기에 그녀는 어느 정도 잘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아가고 있었다고. 독립해 친구네 집에 세 들어 살며 똑똑하게 사회생활을 이어갔던 그녀는 친구 부모님과 친구의 오빠 눈에 들었고,

끝내 친구의 오빠와 결혼을 하게 됐다. 그저 안정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꿈이었기에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믿음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두 아이를 낳으며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하늘도 참 무심했다. 간신히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던 그녀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쳤다. 신뢰와 책임을 저버린 남편과의 불화가 이어졌고, 두 아이와 함께 책임감 없는 가장의 그늘 아래 가정을 이어간다는 것은 그녀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녀는 결혼 5년 만에 이혼을 선택했다.

그녀의 30대, 보물 같은 두 아이를 데리고 그녀는 또 혼자가 돼 세상을 마주해야 했다. 이제는 어린 아이들까지 혼자 책임져야 했기에 더욱 열심히 살았다. 명동칼국수, 제과점, 갤러리 운영까지 그녀는 손에 닿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며 아이들을 키웠고, 힘들고 버거운 순간순간도 아이들을 보며 꾹꾹 참고 견뎌왔다. 하지만 때로는 아이들마저 그녀를 옥죄는 듯 경찰서·병원을 오가며 아이들 문제로 씨름한 시간도 많았다고.

“죽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죽을 자격도 없더라고요. 아이 둘을 두고는.”

정말 많이 힘들었지만, 그렇게 그녀는 살아내는 용기를 선택했다.

 

행복을 향한 홀로서기
그 후 28년. 그녀는 두 아이들을 모두 훌륭히 키워냈고, 지금은 자신의 삶 또한 단단히 지켜가고 있다. 재혼의 제안도 있었지만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 번 실패해 봤기 때문에 자신도 관심도 없게 된 것 같아요. 내 돈 하나 마음대로 못 쓰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다시는 싫었어요.”

이제 그녀에게 삶은 조용한 감사의 연속이다. 탄천을 뛰며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죽고 싶은 마음을 달래려고 계속 달렸습니다. 탄천을 달리며 많이 울기도 하고 우울감에 힘들었어요. 그런데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니 서울대병원이 보이더라고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저 병원에 누워 있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구나. 내가 이렇게 달릴 수 있는 것이 감사하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지금까지 계속 그 감사함을 떠올리며 지내요. 따뜻한 집에서 눈뜨고, 사람을 만나 밥을 먹고 아프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지금은 마음 건강에 관한 공부도 시작해 끊임없이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활동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혹독한 삶 속에서 자존감 하나만은 끝까지 놓지 않으며 자신을 지키고, 계속되는 공부와 마음 건강의 시간으로 자신의 삶을 행복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여전히 곱디고운 미소를 가지 그녀에게 “혹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시 또 배우의 길을 갈까요?” 라는 질문에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절대요. 너무 힘들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 길을 지나왔기에 지금의 제가 있어요. 이제는 지치지 않게 내가 진짜 주인이 되어 안정되고 행복한 나의 삶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굳은 의지와 삶에 대한 성실함, 꺾이지 않는 자존감. 그녀의 이야기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치열했고 그 어떤 인생보다 당당했다. 특별할 것도, 구체적일 필요도 없다. 앞으로 계획하는 그녀의 안정된 모든 시간들이 더욱 빛나게 다가오기를 함께 바라본다.

writer _안정미 기자 / photo _조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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