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컬럼 - 일상과 생각 / 창고는 무엇을 품는가 (2)

Column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07-21 10:05:57
-사람 잘못 보셨는데요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참, 글이란 묘하다. 처음에는 시대에 따라 부(富)의 간판이 어떻게 옮겨 다녔는가에 대한 세태 이야기를 쓰려 시작한 글이었다. 그러나 고향의 사라진 양조장 터와 대형병원 자리를 활자로 불러내자마자, 내 안의 낡은 창고 문이 제멋대로 열려버렸다. 그 안에는 데이터센터의 기억장치 대신, 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생생하게 아려오는 한 사람의 얼굴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 시절, 집 앞 신작로 건너편 고아원 마당은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전쟁이 멈춘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았던 그 시절 그곳엔 내 나이 또래의 고아들이 많았다. 우리는 장난감이 없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공터 모래더미에 고갯길을 닦고 터널을 만들어 고무신 한 짝을 구부려 만든 자동차를 굴렸고, 나무토막을 깎아 만든 칼을 차고 삼총사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 마당에서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곳은 건초 창고다. 창고 한구석에는 낡은 탁구대가 놓여 있었는데, 가슴이 겨우 닿을 듯 말 듯 한 작은 키로 우리는 그 앞에서 용을 쓰며 수도 없이 탁구공을 주고받았다. 그때 몸으로 배운 감각이 어찌나 깊었던지,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탁구채만 잡으면 자전거나 수영을 다시 탈 때처럼 몸이 먼저 어릴 적 동무의 호흡을 기억해 낸다.

어쩌다 미군 트럭이 애육원 마당에 들어오는 날은 우리에게 축제나 다름없는 날이었다. 아이들 틈에 섞여 얻어 온 미제 껌은 하루 종일 씹다가 문지방에 붙여두고 다음 날 다시 씹을 만큼 귀했고, 그때 얻은 과자 중에서는 평생 처음 맡아보는 낯설고 황홀한 향기가 나는 것도 있었다. 천국의 냄새가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던 그 향이 ‘코코넛’이라는 이국적인 과일의 이름이라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요즘은 마트에 널려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는 흔한 과자이지만, 내 마음의 창고에는 여전히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향기로 저장되어 있다.

그런데 그 친했던 동무들은 중학생 무렵이 되자 거짓말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일정 나이가 되면 창고가 비워지듯 보호시설을 떠나야 한다는 비정한 원칙을 철부지 동네 친구가 알 리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동무를 잃은 소년은 자라서 서울로 대학을 가고 청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풋풋한 대학 새내기 교복을 입은 친구들과 함께 학교 앞 중국집을 찾아 당시 삼십 원인가 했던 짜장면을 시켰을 때였다. 단무지를 내려놓고 휙 돌아서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젓가락을 쥔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중학교 무렵 애육원에서 갑자기 사라졌던 그 친구였다. 건초 창고에서 나와 함께 수없이 탁구공을 주고받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너무 반가웠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짜장면 값을 치르며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저, 혹시 아무개 아니세요? 나, 고향 친구 누구인데!“ 

 

순간, 땀에 젖은 친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내 교복의 칼라에 시선이 잠시 머물더니, 흔들리던 눈빛이 이내 아래로 떨어졌다. 친구는 고개를 돌린 채 낮고 낯선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잘못 보셨는데요.”

어색한 공기 속에서 가게를 나오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 눈매와 그 목소리는 내 마음의 창고에 새겨진 그 동무가 확실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 다음 날 점심, 혼자 다시 그 중국집 문을 열었다. 그러나 어제 보았던 친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주인에게 친구의 행방을 묻자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어제부로 그만뒀어요.“ ...

세월이 흐른 뒤, 나는 가끔 그날을 떠올린다. 그는 나를 못 알아본 것이 아니라 차마 아는 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가장 맑았던 어린 시절만은 끝내 지키고 싶었을 테니까. 

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내가 건넨 반가움이 누군가에게는 비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세상에는 끝까지 숨기고 싶은 삶의 결핍이 있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려서 알지 못했다. 이후로 나는 어느 낯선 도시에 가든 중식당에 들어서면 종업원들의 얼굴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 세월이 흐른 뒤에는 혹시나 그 친구가 자리를 잡아 주방장이 되거나 사장님이 되지는 않았을까 싶어, 특히나 카운터에 앉은 중년의 사내들을 유심히 쳐다보곤 했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끝내 그 친구의 행방은 찾지 못했다. 지금도 고향에 내려가 대형 병원 건물로 바뀌어버린 신작로 건너편을 지날 때면, 나는 주차장 모퉁이에 멍하니 서서 흐려지는 눈을 훔치곤 한다.

세상이 아무리 눈부시게 진화하여 천문학적인 데이터를 담아두는 창고를 짓는다 한들, 홀로 떠나야 했던 내 동무의 그 밤을 어디에 저장할 수 있겠는가. 내 교복의 깃을 바라보며 애써 외면해야 했던 그 여린 청춘의 마음을 어떤 서버가 기억해 주겠는가. 그것은 오롯이 기계가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며, 오직 내 낡은 마음의 창고 구석에서만 여전히 상하지 않은 채 아프게 요동치고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인간의 기억이다.
 

 

[ⓒ 욜드(YOLD).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