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그날 밤 몽골 대령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박정하 일상과생각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08-04 09:47:16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몽골의 축제인 나담을 소개하며 음악과 초원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나니, 그 시절 가슴 한켠에 남아 있던 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2006년 여름, 나는 어느 민간 문화 협회의 요청을 받아 몽골 국방부 산하 군 예술단 교향악단에 악기를 기증하러 울란바토르를 찾았다. 바이올린과 첼로, 트럼펫 등 스무 점 남짓의 악기를 전달했고, 다음 날 그들은 감사의 뜻으로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제2번'과 몽골 전통 성악 '흐미(Khöömii)'를 들려주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공식 일정이 끝난 뒤 우리 일행은 국방부에서 나온 한 대령과 식사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군 예술단을 담당하던 분이었던 것 같은데, 음악을 무척 사랑하고 식견이 깊은 분이었다. 보드카 잔이 몇 순배 돌자 대화는 음악을 넘어 역사와 언어, 그리고 한국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술기운이 살짝 오를 무렵, 그가 문득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를 '몽고'라고 부르지 말고, 반드시 '몽골'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가 어릴 적 교과서에서 익숙하게 접했던 '몽고(蒙古)'라는 표현이 중국식 한자 표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많은 몽골인들은 비하(卑下)의 뉘앙스가 섞여 있는 그 표현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면 그들 스스로 부르는 '몽골(Mongol)'은 '용감한', '무적의'라는 자긍심 높은 뜻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이자 자존심이라는 것을 그날 대령의 눈빛을 통해 배웠다 이야기가 더 깊어지자 그는 웃으며 또 하나의 뜻밖의 말을 건넸다. 

 

"우리는 처음부터 키릴 문자 대신 한글을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순간 농담인 줄 알고 바라보았지만, 이어진 설명은 무척 진지했다. 몽골은 오랫동안 독특한 세로쓰기의 전통 문자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소련의 강한 영향 아래 놓이면서 교육과 행정 체계가 소련식으로 개편되었고, 결국 러시아식 키릴 문자를 공식 문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키릴 문자가 행정과 교육에는 편리했지만, 몽골어 특유의 풍부한 발음과 미묘한 음색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뛰어난 한글은 몽골어의 발음 체계와도 매우 잘 어울리는 표음문자이며 거기다 어순까지 같다고 했다. 그의 말은 단순히 한글을 칭찬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나라가 겪어야 했던 역사의 굴곡을 담담히 들려주는 고백처럼 들렸다. 훗날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 몽골 학계에서도 한글의 표기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그와 비슷한 논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존심과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술잔이 몇 번 더 부딪힌 뒤, 대령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농담처럼 덧붙였다.

"이럴 바엔 차라리 한국하고 나라를 합쳤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껄껄거리며 웃었지만, 거대한 인접국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해 온 역사의 무게와, 그 속에서 한국을 향해 보여준 깊은 신뢰와 호감이 느껴져 마음이 짠해졌다. 당시에도 울란바토르 거리에는 한국에서 건너간 중고차들이 즐비했고, '불광동', '미아리' 같은 한글 노선표를 그대로 단 버스들이 정겹게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무 해가 지난 지금,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울란바토르에는 한국 편의점과 식당, 한국식 아파트가 빠르게 늘어나 '몽탄 신도시'라는 정겨운 별칭까지 생겼다고 한다. 문득 그날 밤, 환하게 웃던 그 대령의 얼굴이 떠오른다. 물론 나라를 합치자는 말이 진심이었을 리는 없다. 하지만 한국을 단순한 이웃을 넘어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여기던 그의 마음만큼은 분명 진심이었다.

 

돌이켜 보면 몽골과 나를 이어 준 것은 거창한 외교나 정치가 아니었다. 악기 몇 점이었고, 초원에 울려 퍼진 음악 한 곡이었으며, 이름 하나에 담긴 민족의 자존심을 이야기하던 한 사람과의 따뜻한 대화였다. 그래서 지금도 '몽골'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득히 펼쳐진 초원보다 먼저 그날 밤 환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리던 그 대령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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