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 나미야 잡화점에 다시 들어가 보니
- 박정하 일상과생각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08-10 18:11:49

책장 한구석에 오랫동안 꽂혀 있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450쪽이 넘는 제법 두툼한 분량이지만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세월이 흘러 내 나이가 달라진 탓인지, 예전에는 기묘한 설정과 등장인물들의 사연 자체에 눈길이 갔다면 이번에는 편지를 받아주는 나미야 할아버지의 마음이 유난히 깊게 다가왔다.

이 소설의 가장 독특한 장치는 단연 '시간'이다. 낡은 셔터를 사이에 두고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며, 사람들은 편지를 통해 시공간을 오간다. 요즘처럼 메시지를 보내고 곧바로 답이 오기를 기다리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사연을 밤새 읽고 어떤 말을 건넬지 고민하며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나미야 잡화점의 '시간의 여백'은 그 자체로 아련한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남의 고민을 듣는 데도 너무 서두른다. 상대가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자기 경험을 끌어오고, 해결책을 찾아주려 한다. '그럴 땐 이렇게 해.'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내가 너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텐데.‘

그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것보다 조언 하나 건네는 일이 훨씬 쉽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편지를 보낸 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묘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절박하게 답을 구하지만, 사실 대부분 이미 마음속 어딘가에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지만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니 고민을 들고 찾아온 이들은 어떤 거창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마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진심으로 들어줄 경청자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 내용도 없는 백지 편지가 날아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 한 장이지만,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생각해 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마음,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 나미야 할아버지는 그 백지를 빈 종이로만 보지 않았다. 그 안에 들어 있을지 모를 마음까지 헤아리려 했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상담'이라는 말보다 '경청'이라는 말이 오래 남았다. 참된 경청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그 사람의 자리에서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전에, 왜 그런 마음이 되었는지를 먼저 헤아려보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나서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지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내 마음이 누군가에게 제대로 도착했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씨의 부고를 계기로 오래전 책을 다시 펼쳤지만, 정작 가슴 깊이 남은 것은 소설 속 화려한 기적이 아니었다. 사람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기적은, 거창한 답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금 더 오래 들어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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