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 깊은 그리움을 노래하는 은발의 프린스 가수 배동진 “하늘로 떠나며 온전히 내게 와 준 나의 아버지”

Interview / 안정미 기자 / 2025-10-19 20:12:55

[욜드(YOLD)=안정미 기자]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1세대 코미디언 故)배삼룡(이하 배삼룡)의 아들 가수 배동진을 만났다. 은발의 프린스라 불리는 그는 멋스런 은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중년이 된 지금도 아버지 이야기에 눈시울이 내리 붉어진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어느덧 15년이 지났지만, 오롯이 ‘나의 아버지 배삼룡’을 가슴에 안은 지 아직 15년인 셈이라 어쩔 수가 없다. 트로트 가수가 되어 아버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노래로 들려주는 배동진, 그의 인생을 들어본다.

지금은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배동진은 아버지의 예술적 DNA를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음악, 연기 등 예술분야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되지 않은가, 故) 배삼룡의 아들이니 말이다.

잠깐의 꿈
그는 대학시절 음악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러니까 배삼룡이 1세대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을 그 시절의 연예계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었기에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의 의견을 존중할 리가 없었다. 험하디 험한 연예계 일이기에 아버지의 반대가 심한 것도 이해는 되지만, 그 반대의 강도가 너무 심하다 보니 꿈을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신이 그 어려웠던 시절, 코미디언이라는 위치에서 어렵게, 어렵게 지내왔기에 아들만큼은 공부를 잘해서 보란 듯이 다른 멋진 길을 편안하게 걸어가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마음,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혈기왕성하던 철없던 그 때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서라도 몰래 하고 싶은 마음마저 청춘 같았다. 대학 밴드 활동을 시작해버렸다. 젊은데, 이렇게 젊고 하고 싶은데, 못할 것 없다는 열정으로 몰래 밴드 활동을 시작하고 보컬이 됐다. ‘몰래’였기에 더욱 달콤했던 대학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다 하지 않은가. 얼마 못가 밴드 활동을 하던 것을 아버지에게 걸리고 말았고 화가 많이 난 아버지에 끌려 군대에 입대하게 됐다. 그의 젊은 시절 잠시 맛본 음악의 세계는 정말 꿈만 같았다.

영화배우 배동진
군대라는 곳에서 혹독한 훈련을 겪으며 긴 시간 잊고 지낸 줄로만 알았었는데, 전역 후에도 배동진의 마음속에는 연예계에 대한 갈증이 커져만 갔다. 그 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영화감독을 만나게 된 것을 인연으로, 훤칠한 키와 눈에 띄는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인 배동진은 스물여섯이 되던 그 해 영화배우의 길로 먼저 연예계에 한 발 내딛게 된다. 드라마 사랑과 야망, 심형래의 다양한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신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험한 연예계에서 코미디언이라는 이유로 웃음거리가 되기도, 손가락질을 받기도, 그의 아들이라고 괜히 피해를 보기도 했던 그 시절 배동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본인의 일을 사랑했던 아버지를 닮았기에 다짐했던 것이 있다. 어떤 역할이든 자신을 찾아주는 이에게 실망시키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배우로서의 의무를 다 할 것이라는. 그런데 어쩌면 그게 독이 되었을까.

에로영화가 성행하던 그 때 그저 신인으로 열심히 활동하고자 했을 뿐인데, 주어진 에로영화의 역할을 잘 해왔을 뿐인데... 화려하고 수려한 외모 때문이었을까 에로배우로 조금씩 낙인, 그에게는 더 이상 평범하고 좋은 역할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인데, 차갑고 냉정하기만 했던 연예계였다. 그 때는 정말 더 그랬던 시기라고 한다.

누구의 아들이 아닌 혼자의 힘으로
비디오의 시대가 끝나고 그 시절 배우들은 유명 배우가 아닌 이상 설 자리를 잃어만 갔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연기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배우의 꿈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흐려져만 갔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놓지 않고, 식당이나 외곽 라이브 카페 등지에서 기회를 찾으며 노래를 부르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지냈다.

혹자는 배삼룡의 아들인데 왜 힘들어? 빽 쓰면 되잖아! 라고 얘기하기도 하겠지만 배동진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의 명성을 도구 삼아 청탁을 한다는 것?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유명세로 덕을 보거나 아버지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일은 물론, 아버지의 그림자에 갇혀 있다 생각하는 것도 모두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는 아버지로, 나는 나로 그렇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다. 때문에 설 자리가 사라지고 어렵던 시기에도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거나 부탁을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없다
지난 2010년 세상을 떠난 배삼룡. 서운하거나 미워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그저 그리운 존재다.

“아버지에게는 항상 죄송스럽죠. 계실 때 제가 잘 해드리지 못했어요. 저만의 이유로 원망과 미움 그런 마음들이 늘 컸던 것 같아서 지금 아버지를 생각하면 많이 죄송한 마음입니다. 후회스럽고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제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게 많거든요. 아주 잘 물려받은 끼와 건강이 있어서 지금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힘든 시간이 참 길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앞으로는 더 잘 살아보려고 합니다.”

아버지의 맨발
그렇게 그는 아버지 향한 마음을 노래하는 트로트 가수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아버지의 맨발’이라는 곡을 발표하면서 노래 안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가득 담았다. 듣는 이로 하여금 부모님을 떠올리게 해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 곡은 ‘아버지 배삼룡’을 추억하며 만든 노래로 깊은 감동과 사랑을 전한다.

“돌아가시던 날 침대 발끝 쪽에 제가 있었어요. 그 때 아버지 맨 발을 자세히 처음 보게 된 것 같아요. 눈물 나게 짠해 보이던 아버지의 발을 처음 보고, 만지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와 목욕탕 한 번 가는 게 소원이었지만 갈 수가 없었거든요. 어딜 가나 사람들이 몰려들 게 뻔하니까. 유명한 코미디언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저희의 아버지만이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코미디언이었던 거죠. 한 번도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가져보지 못했었는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이렇게 맨발로 온전히, 정말 온전히 저한테 오셨어요. 그 날의 감정을 잊지 못해서 노래 ‘아버지의 맨발’에 제 마음을 담아봤습니다.”

눈물 없이 배동진의 ‘아버지의 맨발’을 듣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가사를 들었을 때도 가슴 시린 그리움이 느껴졌는데, 이렇게 그의 이야기와 마음을 듣고 가사를 들으니, 펑펑 울게 생겼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의 노래를 들려주는 가수 배동진이기에 누구나 공감하며 그의 가수생활을 응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세상 사람들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는 추모 사업을 구체화하고, 대외적으로 활동 기반을 넓히려 한다. 그는 오래 전 처음 봤던 故)배삼룡 리사이틀 무대 위 아버지의 완벽한 ‘프로’의 모습에 깜짝 놀랐었던 그날을 기억한다. 그 프로페셔널한 대한민국 1세대 코미디언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과 추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근사한 은발의 머리카락이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지금의 나이가 됐지만 가슴 속에는 한국의 찰리채플린 故)배삼룡을 원 없이 ‘아빠, 아빠’ 부르는, 아직 어린 배동진의 여린 감정이 이야기 하는 내내 느껴졌다. 어린 배동진과 은발의 프린스 배동진에게 깊은 의미를 가진 멋진 그 꿈이 꼭 빠른 시일 내 실현되기를 소망한다.

writer _안정미 기자 / photo _조용수 기자 / 장소 _용인 파네시마복합문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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