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is / 1989년 7월 16일 지휘의 황제 '카라얀'이 사망 > 오케스트라의 장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Midlife Culture / 최장용 / 2025-07-16 08:00:54
-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새로운 해석을 창조해
20세기 음악사를 통털어 놓고 볼 때 지휘자 '카라얀'만큼 엄청난 화제와 각광을 받은 사람은 없다. 그는 아마 지휘자라는 전문직업인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모든 것들을 쓸어안고 가버린 영원한 '황제'임에 틀림없는 지휘자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쏟아진 찬사가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지휘자로는 보기 드물게 언제나 찬반양론을 일으킨는 격론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그런 것들을 자기 자신의 고집과 방식대로 소화시켜 버린 희대의 '독재자'이기도 했다. 격렬한 몸짓이 없으면서도 언제나 격렬한 논란을 낳게 했던 지휘자, 그가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카라얀'이 인류 최고의 지휘자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카라얀'의 위대함은 그가 자신있어했던 곡들은 예외 없이 곡의 핵심을 짚어주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는 '카라얀' 스스로가 탁월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높은 표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연주를 평가해가며 만족스러울 때까지 계속 다듬어 갔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의 연주 중 후대 지휘자들이 넘보기 힘든 높은 경지를 보여준 곡들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 베토벤의 홀수번호 교향곡들, 브루크너의 후기 교향곡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등이 있다. 이러한 곡들은 교향곡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곡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치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곡들이며 오케스트라의 명예욕과 지휘자의 카리스마적인 통솔력이 없이는 높은 완성도를 보이기가 힘든 곡들이다. 또한 '카라얀'은 교향곡외의 관현악곡에 뛰어나기로 유명할 뿐아니라, 그의 바그너 오페라 작품들만으로도 카라얀은 능히 그의 이름을 불멸로 남길 수 있었다.
1989년 7월16일 세상을 떠난 지휘자 '카라얀'은 타계하기 불과 3개월 전, 34년간 몸담아 왔던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지휘자의 자리에서물러났다.1954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한 후 '세르지우 첼리비다케'가 베를린필 음악감독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37세의 '카라얀'은 베를린필의 종신지휘자 겸 예술감독에 임명되면서부터 그는 세상에 이름을 알려지게 되었다.
1987년 1월 1일엔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의 나이 80이 되는 1988년에는 그의 아내가 음반 표지를 그린 100장의 기념음반이 DG에서 기획되기도 했다. 그해 4월엔 예정된 연주회를 최소하고 베를린 필과 함께 일본, 같은 해 10월엔 마지막 유럽 순회공연을 떠난다. 1989년 2월에 빈 필과 함께한 미국 공연은 그의 마지막 공식 연주가 된다. 그해 7월 16일 잘츠부르크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오전 리허설을 끝낸 '카라얀'은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 온갖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았던 '카라얀'도 이제 서서히 전설의 역사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그러나 '카라얀'이 빈 필하모니와 함께 연주했던 무수한 기록들은 레코드로 재생되어 길이길이 그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지휘자 '카라얀'이 누리는 불멸의 예술혼이 있다.
20세기 음악사를 통털어 놓고 볼 때 지휘자 '카라얀'만큼 엄청난 화제와 각광을 받은 사람은 없다. 그는 아마 지휘자라는 전문직업인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모든 것들을 쓸어안고 가버린 영원한 '황제'임에 틀림없는 지휘자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쏟아진 찬사가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지휘자로는 보기 드물게 언제나 찬반양론을 일으킨는 격론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그런 것들을 자기 자신의 고집과 방식대로 소화시켜 버린 희대의 '독재자'이기도 했다. 격렬한 몸짓이 없으면서도 언제나 격렬한 논란을 낳게 했던 지휘자, 그가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카라얀'이 인류 최고의 지휘자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카라얀'의 위대함은 그가 자신있어했던 곡들은 예외 없이 곡의 핵심을 짚어주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는 '카라얀' 스스로가 탁월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높은 표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연주를 평가해가며 만족스러울 때까지 계속 다듬어 갔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의 연주 중 후대 지휘자들이 넘보기 힘든 높은 경지를 보여준 곡들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 베토벤의 홀수번호 교향곡들, 브루크너의 후기 교향곡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등이 있다. 이러한 곡들은 교향곡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곡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치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곡들이며 오케스트라의 명예욕과 지휘자의 카리스마적인 통솔력이 없이는 높은 완성도를 보이기가 힘든 곡들이다. 또한 '카라얀'은 교향곡외의 관현악곡에 뛰어나기로 유명할 뿐아니라, 그의 바그너 오페라 작품들만으로도 카라얀은 능히 그의 이름을 불멸로 남길 수 있었다.
1989년 7월16일 세상을 떠난 지휘자 '카라얀'은 타계하기 불과 3개월 전, 34년간 몸담아 왔던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지휘자의 자리에서물러났다.1954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한 후 '세르지우 첼리비다케'가 베를린필 음악감독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37세의 '카라얀'은 베를린필의 종신지휘자 겸 예술감독에 임명되면서부터 그는 세상에 이름을 알려지게 되었다.
1987년 1월 1일엔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의 나이 80이 되는 1988년에는 그의 아내가 음반 표지를 그린 100장의 기념음반이 DG에서 기획되기도 했다. 그해 4월엔 예정된 연주회를 최소하고 베를린 필과 함께 일본, 같은 해 10월엔 마지막 유럽 순회공연을 떠난다. 1989년 2월에 빈 필과 함께한 미국 공연은 그의 마지막 공식 연주가 된다. 그해 7월 16일 잘츠부르크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오전 리허설을 끝낸 '카라얀'은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 온갖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았던 '카라얀'도 이제 서서히 전설의 역사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그러나 '카라얀'이 빈 필하모니와 함께 연주했던 무수한 기록들은 레코드로 재생되어 길이길이 그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지휘자 '카라얀'이 누리는 불멸의 예술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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