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 계은숙을 만든 전설의 작곡가 김현우, “오늘도 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 Interview / 유성욱 기자 / 2025-12-28 10:39:09

김희갑 양인자 부부에 비견되는 음악인생
또 한 번의 대형 콘서트를 통해 대한민국 최고 가왕(歌王)임을 입증한 조용필의 수많은 히트곡 중에는 아시다시피 한 작곡가의 이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바로 김희갑이라는 작곡가다. 1936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4 후퇴 당시 대구로 피난왔다가 기타 잘 치는 고등학생으로 미 8군 밴드 소속이 된 이래 60년 동안 무려 3,000곡을 작곡하며 한국의 대중음악 황금기를 이끈 국민 작곡가로 기록된다. 지금은 뇌경색 후유증으로 기억도 사라지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 89세 말년의 삶을 살고 있지만 지난 11월에는 그의 음악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이 개봉되며 묵직한 울림을 전하기도 했다.
1969년 ‘바닷가의 추억’ ‘진정 난 몰랐었네’를 작곡한 이래 혜은이의 '열정', 김국환의 '타타타',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임주리의 '립스틱 짚게 바르고', 양희은의 '하얀 목련',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그리고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향수', 뮤지컬 '명성황후' OST 등이 그가 남긴 수많은 히트곡 중 일부. 김희갑의 작곡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점은 조용필의 입을 통해 불려진 불멸의 노래들이다. ‘그 겨울의 찻집’ ‘Q’ ‘서울 서울 서울’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조용필이 부른 많은 히트곡들이 작곡가 김희갑의 작품, 그래서 김희갑이 빠진 조용필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김현우의 노래 인생이 김희갑과 오버랩 되는 중요한 부분은 하나 더 있다. 바로 부부 음악인이라는 점이다. 작곡가 김희갑은 작사가 양인자와 합을 이루며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조용필 노래의 무려 21곡이 김희갑 작곡 양인자 작사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작곡가 김현우의 아내 안언자도 작사가로 활동한다. 반백년 넘도록 김현우가 작곡한 600여곡 중 3분의 2가 안언자 작사라고 한다. 특이한 점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출신에 소설가와 방송작가 이력을 가진 작사가 양인자와 달리 작사가 안언자는 따로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양재기술을 배우러 서울에 왔다가 생계를 위해 양장점에서 근무하던 직원 출신이었다. 그래서 더욱, 잘 알려진 김희갑 양인자 콤비와 달리 덜 알려진 김현우 안언자 콤비의 사연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울산에서 태어난 김현우는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림을 잘 그렸고, 음악을 좋아했다. 시대를 잘 만났다면 인생이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군인이셨다. 환쟁이나 딴따라 아들은 있을 수 없었다. 어린 김현우가 어느 미술대회에 나가 이젤을 타오면 아궁이 속에 던져졌다. 아버지의 바람과 자신의 꿈이 극단으로 치닫으니 달리 선택할 도리가 없었다. 부산을 떠나 상경했다. 보광동에 이모할머니가 있었다. 그곳에 기거하며 충무로에 나가 살았다. 충무로에는 지구레코드사가 있었고 한국 가요계에 전설과 같은 존재인 반야월 박시춘 선생이 활동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음악을 사사받지는 못했지만, 충무로 가요동네에서 대가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가요계 생태계와 접했다.
음악인생은 작사로 시작했다. 1968년 남미랑이 노래한 ‘진도 아가씨’와 강소희가 노래한 ‘무정’의 노랫말을 쓰며 작사가로 데뷔했고, 이듬해인 1969년에는 <울지도 못합니다>라는 영화의 주제가(리타김 노래)까지 작사하며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작사가로의 활동은 거기까지였다. 군대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군생활은 강원도 화천의 27사단에서 했는데, 사회에서의 경력을 살려 군악대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군악대 생활은 저에게 큰 축복입니다. 실력있는 고참들이 많았거든요. 제가 음악을 제대로 한번 배웠다면, 그건 군악대 시절입니다. 작곡도 그곳에서 터득했구요.”
군악대 전역 후 다소 방황하는 시간도 거쳤지만 1977년 ‘내 대신 말래줄래(성재일 노래)’란 노래로써 작곡가로 데뷔한다. 이후 폭풍처럼 히트곡을 쏟아내며, 작곡가로서 황금기를 갖는데, 그 시발이 바로 계은숙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공전의 히트곡들이다.

혜성같이 나타난 대형가수로의 시작을 알린 사실상 첫 앨범은 1980년 발매된 서라벌레코드사의 독집앨범이다. 김현우는 앨범에 실린 9곡 중 8곡을 작곡했는데, 김현우 작사 안언자 작곡 ‘노래하며 춤추며’와 ‘기다리는 여심’이 단박에 떴다. 계은숙은 1980년 MBC 10대 가수상 신인가수상을 차지하며 스타덤에 오른다. 1980년대 컬러TV 시대의 개막과 함께 가장 주목받은 원조 비디오가수로 시원한 고음허스키가 돋보이는 경쾌한 리듬과 멜로디의 결합이 지금 돌이켜봐도 환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작곡가 김현우의 회고.
“그런데 10대 가수상 신인가수상 수상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반응의 정말 폭발적이었습니다. 가요톱텐 1위 수상도 당연했죠. 마침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5주 연속 1위에 오르며 골든컵 트로피 수상과 함께 순위에서 빠지게 되어 있었죠. 제가 작곡한 노래가 당연히 1위에 오를 찰라였는데, 사고가 터진 거예요.”
지금도 이따금 오르내리는 희대의 생방송 펑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981년 MBC TV ‘금주의 인기가요’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이었다. 그 사건으로 모든 방송에서 2년 출연정지 처분을 받는다. 노래가 잘 나가고 있는데, 날벼락이 떨어진 격이었다. 자신의 노래 대신 진미령의 ‘하얀 민들레’가 1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김현우는 그 일로 크게 화를 내고, 다시는 계은숙하고는 작업을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계은숙의 상품가치는 여전했다.

처음에 김현우는 고집스럽게 거절했다. 하지만 잇단 요청에 결국 수락하고 3곡을 작곡한다. 1981년 발매한 태양음향 전속기념 앨범에 수록된 ‘다정한 눈빛으로’ ‘나에게 당신밖에’ ‘연정’ 역시 계은숙의 대표곡으로 인기를 모았다. 가수 계은숙과는 한번 더 작업을 같이한다. 1985년 일본에 진출해 엔카가수로 큰 인기를 모은 계은숙은 1986년 어머니의 환갑을 맞아 한국에 잠시 온다. 이때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냈는데, 얼마 전 MBN ‘현역가왕’에서 가수 박혜신이 불러 다시 주목받기도 했던 ‘비의 초상’과 ‘바람은 왜 불었나요’ 가 바로 그 앨범에 실렸다. 그래서 한국에서 발표한 계은숙의 노래 거의 전부가 바로 김현우가 만든 노래라고 하는 것.

김현우가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방황하던 시기였다. 보광동 이모할머니댁 근처에 세탁소가 하나 있었다. 그래도 충무로를 드나들며 기웃거리는데, 옷이라도 번듯해야 했다. 세탁소를 이용하다 주인과 친해졌다. 세탁소 주인은 자신의 처제를 소개했다. 처제의 고향은 충청남도 보은, 양재를 배우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생계를 위해 광화문 근처의 한 양장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둘은 마음이 맞았다. 고향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는 둘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서울로 보낸 딸이 딴따라를 꿈꾸는 놈팽이를 만난다는 소식을 전해듣은 고향의 부모님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서울생활 때려치우고 당장 고향으로 오라고. 하루가 멀다고 밀어를 속삭이던 둘은 하루 아침에 생이별을 하게 된다. 수없이 많은 편지가 오갔다. 문학소녀였던 안언자, 그리고 군대 가기 전 작사가로 먼저 데뷔했던 김현우, 연서(戀書)에 담긴 한 글자 한 글자가 얼마나 절절했을까.
“당시 아내가 보낸 편지 속 문장들이 바로 가사가 됐습니다. 무명의 작곡가였던 저는 그 노랫말에 맞춰 곡만 만들면 됐지요. 그래서 초기의 히트곡 대부분이 김현우 작곡 안언자 작사가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600곡 정도 작곡했는데, 3분의 2 가량을 아내가 작사했지요.”
‘내 마음 외로울 때 눈을 감아요/ 자꾸만 떠오르는 그대 생각에/ 가슴에 느껴지는 사랑의 숨결 멀리서 아득하게 전해오네요’ (계은숙 ‘기다리는 여심’ 1979년)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린 만났죠 (…) 너와 나 둘이는 사랑한 사람/ 마음과 마음으로 맺어진 관계/ 긴 세월 간다 해도 떠날 수 없는/ 너는 나 나는 너 영원한 사이’ (허윤정 ‘관계’ 1980년)
‘밀밭길 울타리 사이로 조그만 오솔길 있네/ 지금은 내곁을 떠나간 너와의 사랑의 자리/ 그 길은 우리들의 이야기가 알알이 새겨진 길’ (허인순 ‘밀밭길 추억’ 1981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함께 모여서 흥겨웁게 춤을 춥시다/ 괴로운 일 슬픈 일 모두 잊어버리고 이 순간을 노래 불러요/ 오고가는 눈길 속에 사랑이 넘치고 그대와 같이 느껴보는 행복한 기분 지난 일은 생각을 말고 춤을 추어요’ (계은숙 ‘노래하며 춤추며’ 1979)
김현우 안언자 부부는 요즘도 가요계 행사가 있으면 꼭 붙어다닐 정도로 금실이 좋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아들은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방사선팀장으로 일하고 있고, 딸은 이화여대 법대를 나와 직장생활을 한다. 음악가 부부의 피가 분명히 흐를텐데, 팬의 입장에서는 음악하는 자녀가 없다는 게 다소 아쉽기는 하다.
한편에선 예술은 항상 좋은 환경에서 더 빛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역경과 고난이 예술로 승화되는 사례를 부부에게서 본다.

1968년에 작사가로 출발하고 1977년 작곡가로 데뷔해 수많은 히트곡을 낸 한국 가요계의 전설 김현우는 지금도 성좌엔터테인먼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신인가수를 발굴하여 데뷔시키고, 음반을 기획 제작하는 일은 그에게 천직과도 같다. ‘성좌(星座)’의 다른 이름은 별자리다. 반짝거리는 별들의 거처이기도 하다. 성좌엔터테인먼트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대형가수가 탄생한 사례도 숱하다. 1986년 박혜성이라는 신인의 화려한 등장도 한 예다. 지금은 다소 잊혔지만, 당시 고교생이던 박혜성은 ‘경아’란 곡으로 ‘스잔’의 김승진과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엄청난 팬덤을 형성했다.
“고교생 광고모델로 활동하던 있었는데, 제가 앨범을 만들어 가수로 데뷔시키게 됐죠. 그런데 당시 매니저가 좀 불성실했어요. 보다못해 노래를 작곡한 제가 직접 매니저까지 맡았죠. 언론사 찾아다니며 짤막한 단신 하나 부탁하는 상황이었는데, 폭발적인 반응이 온 거예요. 지금 취재 오신 두 분 다 그곳에 계셨으니, 알 거 아니에요. (취재기자와 사진기자 둘 다 서울신문사 매거진국 출신이다) TV가이드에 단신 기사가 나온 지 한 달만에 표지인물까지 됐으니 말입니다.”

그 이듬해엔 김영이라는 신인을 발굴해 대형가수로 키워낸다. 김현우가 만든 ‘사랑 먼저 할래요’가 또 다시 잭팟을 터뜨렸다. 이번에도 라이벌 구도였다. 라이벌 가수 박남정과 쌍벽을 이루는 인기였다.
“지금까지 제가 제일 아깝게 여기는 제자가 가수 박혜성인데요, 혜성의 아버지가 직접 아들의 매니저를 맡겠다고 했을 때, 저는 ‘경아’에 이은 제2탄으로 미리 준비해두었던 발라드곡 ‘소녀의 반지’ 발표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죠. 더 키울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게 저로선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가수로서는 더 잘되지는 못했지만, 요즘 작곡가로 광고기획자로 다방면에서 활동을 잘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수 김영 역시 당시 한국 최고 매니저라는 분이 꼬드겨서 데려갔는데, 안타깝게 더 크지 못했죠. 그 일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게 아쉽기는 하지만, 현지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 한창의 시기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바쳤습니다. 18년 동안의 그러한 노력이 보탬이 되어 지금은 회원 6만명에 저작권 징수액이 연간 4천몇백억인 협회로 성장하며 한국의 음악산업 발전에 많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하지만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몸담은 동안은 작품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 KBS와 MBC 등 공중파 가요프로그램 심사위원, 경인방송 ‘열전 가수왕’ 심사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그나마의 아쉬움을 달랬다. 지금은 다시 작곡과 신인발굴에 힘을 쏟던 그 시절로 돌와왔다. 한때 강남 신사동에 있던 사무실을 동대문구 신설동으로 옮겼다. 옛 음반 재킷이 벽면에 가득하다. 60년 가까운 음악인생을 웅변하듯 고색창연한 사무실이지만 열기는 뜨겁고 활기차다.

좀 더 신인은 없을까? 물어보니 서랍을 열어 김이준이라는 잘 생긴 가수의 USB를 건넨다. 김이준은 TV조선 <미스 트롯2> 초등부 임서원의 삼촌으로 꽤 알려졌는데, 강혜성이라는 본명 대신 새 예명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하며 ‘기죽지 마라’라는 신곡과 함께 김현우에게서 독하게 사사받았다고.
“저는 죽을 때까지 작품을 쓰고, 신인을 키우며 살 겁니다. 지금도 저는 제2의 계은수, 제2의 박혜성을 만들고 싶은 의욕이 넘칩니다.”

writer 유성욱 photo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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