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is / 1970년 6월 2일 김지하 시인,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날> 현대문학 풍자시 백미 ‘오적’필화 사건으로 .

Midlife Culture / 박인권 / 2025-06-02 07:29:02

[Smart Senior News=박인권 기자] 1970년 6월 2일, 시인 김지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오적’의 도입부다. 김지하는 유신을 앞둔 3공화국 정부의 1970년 5월 월간 ‘사상계’에 권력상층부의 부패상을 비판하며 조롱한 풍자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발표했다. 당시 사회 상층부를 구한말 한일합방 을사오적에 비유한 것. 이는 민심의 폭발적 지지를 받았다. 처음엔 조용했다. 하지만 이를 야당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이 전재함으로써 문제가 불거졌다.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것다
볼기가 확확 불이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겄다.


판소리 형식을 빌린 이 풍자시에 등장하는 ‘다섯 도둑’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다. 나라 곳곳에 관직과 재물, 허황된 권세로 위장한 도적들이 영양분을 빨아먹기에 나라가 피골이 상접했다고 시인은 혀를 찼다.

오적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다섯 도적이 하루는 서울 동빙고동에 모여 도둑시합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포도대장은 임금의 명을 받아 이들을 잡으러 온다. 하지만 포도대장은 어이없게도 다섯 도적을 지목한 가난뱅이 꾀수를 무고죄로 몰아 감옥에 가둔다. 그리곤 포도대장은 오적의 개 노릇을 하다가 얼마 뒤 그들과 함께 급사한다는 것


먼저 ‘재벌’은 뇌물 공여, 세금 포탈, 특혜 수의 계약, 부실 공사, 노동 착취 등의 수법으로 온몸을 금칠, 돈 칠한 채 살아가는 도적으로 묘사된다. 두 번째 ‘국회의원’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부정 선거로 당선된 다음 부정 악법 개악으로 부정축재만을 도모하는 도적이란 것. 세 번째 ‘고급공무원 ’은 “되는 것도 절대 안돼, 안될 것도 문제없어, 책상 위엔 서류 뭉치, 책상 밑엔 지폐뭉치/높은 놈껜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먹고 뇌물은 청(請)해먹고”하는 탐관오리로 날카롭게 풍자된다.


네 번째 ‘장성’이나 다섯 번째 도적 ‘장·차관’도 나쁜 짓을 일삼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모두 부정과 불법, 타락으로 얼룩진 채 개인적 치부에만 몰입하다보니 나라 사정과 민중들의 생활고는 더할 수 없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고 한심해했다.


현대문학 풍자시의 백미로 꼽히는‘오적’은 저항의 시대적 의미와 함께 문학적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담시라는 독특한 양식의 서사구조를 통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지다시피 한 민중의 가락을 되살려냈다는 것. 무엇보다 판소리 사설조로 거침없이 풀어내는 운율을 타고 읽어가다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촌철살인 해학이 지금 다시 읽어도 압권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김지하는 이 시를 쓰는 대가로 혹독한 수업료를 치렀다. 100일간 투옥의 아픔을 겪었다. 김지하는 훗날 ‘오적’에 대해 “꼭 사흘 동안 썼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은 아예 없었다”고 밝혔다. 김지하의 담시들이 ‘오적’이라는 제목으로 한 출판사에서 나온 것은 시인이 사면복권된 이듬해인 1985년이었다. 시인은 이 책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다.”

“시가 총칼보다 더 강하다”

종합교양지이자 문예지로 지식인들 사이에 폭넓게 읽혀왔던 ‘사상계’는 판매금지를 당했고 끝내 당국에 의해 폐간됐다. 고 장준하 선생이 1953년 4월호로 창간한 월간 ‘사상계’는 이렇게 사라졌다. 참고로 ‘사상계’가 오는 8월17일,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한 지 31주기가 되는 날을 맞아 부활한다고 알려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복간의 주역인 장 선생의 장남은 “이 시대에도 ‘사상계’가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할 일들이 있다”고 밝혔다.

한편 시인 김지하의 젊은 시절은 시위와 도피, 구속, 재판, 옥살이의 연속이었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사건으로 기소돼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도 했다. 김지하는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명예박사를 수여 받았다. 1963년 첫 시 <저녁 이야기>를 발표한 김지하는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시로 불을 당긴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시가 총칼보다 더 강하다.”80년대 이후엔 유신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가에서 환경·생명운동가로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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