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iversary / 윤·이·상을 회고하다

Anniversary / 조용수 기자 / 2026-06-03 08:15:29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을 아는가?
1973년 6월 3일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베를린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뽑힌 날

[욜드(YOLD)=조용수 기자] 윤이상은 현재까지 세계 음악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작곡가이다. 그는 살아있을 당시에 이미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인정을 받은 보기 드문 음악가이다. 하지만 남북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상황은 그의 개인적인 생활에 비극적인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전 독일베를린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로 베를린예술원 종신회원이며 '독일연방공화국 대 공로훈장'을 받은 작곡가 윤이상. 그의 이름 앞에는 천재 작곡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973년 6월 3일은 작곡가 윤이상이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베를린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뽑힌 날이다. 윤이상은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95년 11월 4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1935년 오사카음악학교에 입학했고 1937년에 귀국하였다. 1939년 이후 일본 오사카, 도쿄에서 첼로, 음악이론, 작곡을 공부했고 1946년~1952년에는 통영과 부산의 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며 1956년까지는 부산과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했다. 그는 1972년 독일 뮌헨올림픽 문화 행사 개막 작품으로 위촉 받은 오페라 심청을 공연(1972.8.1)하여 격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작곡가도 꿈에 그리던 고향 통영을 살아서 밟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윤이상은 1957년 프랑스로 건너가 빠리 음악원에서 오뱅(Tony Aubin)에게, 이후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블라허와 루버, 슈바르츠 쉴링에게 작곡을 배운다. 그 후 유럽의 여러 음악제에 참여하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독일에 정착한 그는 유럽의 현대음악과 한국음악 및 동양음악을 융합하는 작곡세계를 펼쳐나간다. 1967년에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치르는데 이 사건이 그에게 남긴 후유증은 그의 평생에 걸쳐 남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 정부의 간섭으로 2년 후 석방되어 독일로 되돌아간다. 1969년~70년에는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강사로, 그후 벨를린 음악대학에서 명예교수로, 1977년~87년에는 베를린 음악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한국에서보다 유럽의 음악계에 더 알려졌고 유럽보다 세계인에게 더욱 잘 알려져 감동을 주었던 천재음악가, 윤이상이 우리 겨레에게 남긴 족적은 위대하다. 하지만 아직도 음악계 일각에서는 윤이상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보다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친북 작가라는 이름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각이 없지 않다. 순수 음악을 위해 이념과 사상의 굴레를 무시하고 예술혼을 불태워 오던 그는 박정희 군사독재라는 함정에 걸려 참혹한 상처를 받아야 했다. 윤이상을 친북음악가로 매도했던 동백림 사건은 몇 년 전 국정원 과거사실진실규명을 통해서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야욕을 달성하기 위한 간첩단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억울한 누명은 벗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작곡활동은 동요와 가곡 정도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가곡집 '달무리'에서는 고풍의상, 달무리, 추천, 충무가, 편지, 나그네가 실려있다. 고풍의상이나 추천 등은 1960년대 한국에서 많이 불린 가곡에 속한다. 그는 1971년 독일에 귀화하고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 축하 오페라에서 '심청'을 비롯해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한국음악의 연주 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으며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산파 역할을 한 작곡가 윤이상. 지금도 그에 대한 많은 추측이 있지만, 한국을 뛰어 넘어 세계적인 작곡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과 열정은 높이 살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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