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life / 그때 그시절, 조영남의 추억 무교동

Midlife Culture / 최장용 / 2025-05-23 10:02:36
- 무교동 골목은 그의 젊은 시절부터 사령부
- 그 시절 무교동엔 당대를 풍미하던 통기타와 청바지 신문화가 깊숙이 뿌리내려

[Smart Senior News=최장용 기자] 서울 한복판 무교동 골목은 가수 조영남에겐 제3의 고향이다. 황해도 남천이 그가 태어난  첫 번째 고향이고, 두 번째는 피난 내려와 살았던 충남 예산 삽교, 그리고 세 번째가 혈기왕성하던 젊은날 추억이 얽힌 무교동이다. 무교동 골목은 그의 젊은 시절부터 사령부였다.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무교동 골목을 들락거린 것은 그곳에 둥우리 틀고 않았던 경음악 감상실 ‘세시봉’ 때문이었다. 

조영남은 서울 음대 2학년때 이미 클래식보다 경음악에 더 매력을 느끼고 푹 빠져 있었다. 클래식을 아무리 파야 대학교수 되는 것 말고는 뾰족한 미래가 보이지 않아 심드렁 했다. 하지만 경음악은 잘만하면 유명해지고 돈도 벌 수 있을 듯 싶었다. 그래서 주로 외국 팝송을 틀던 ‘세시봉’을 슬슬 들락 거리게 됐다. 이 제3의 고향에서 그는 대단한 죽마고우들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건 엄청한 행운이었다. 이백천, 정홍택, 조용호, 이선권, 박상규, 장우, 이상벽,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최인호, 김도향. 조동진, 김민기, 이종철, 고영수.. 가요계는 물론 영화, 방송, 문단에 걸쳐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을 이때 무교동에서 만났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네들은 훗날 하나같이 유명해졌다.

그 시절 무교동엔 당대를 풍미하던 통기타와 청바지 신문화가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청바지 문화의 기수를 자처했다. 애당초 귀공자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사불란하게 ‘거렁뱅이 패거리’로 뭉쳤다. 가진 것은 골고루 똑같이 나눈다는 얼치기 마르크시즘을 신봉했다. 자장면, 비지백반, 고기 살점은 눈씻고 보아도 없는 감자탕 한 그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세시봉’에서 사시사철 공동으로 숙식하다시피 했다. 송창식이 잠옷처럼 입고 지내던 흰색 여름 수영복 팬티는 겨울이 지날 쯤이면 연탄 색깔이 되곤 했다. 구석진 감상실 주방에서 얻어먹는 저녁밥은 성찬이었다. 의자 두어개 붙여 놓으면 침대였고, 피아노 덮는 천이 이불이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뒤에야 비로소 그게 기막힌 낭만의 순간들이었음을 깨닫는다. 그토록 소중했던 청춘은 잠시 점검해 볼 새도 없이 엄벙덤벙 흘러갔다. 야속한 인생살이 구조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무교동 그 시절에 참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더불어 사는 법을 체험했고 분수를 터득했다.  덕분에 무교동 골목을 떠난지 오래지만 ‘무교동 정신’만은 지금껏 팽개친 적이 없다고 한다. 거기선 자장면 값만 있어도 부자였고, 덧없는 야망을 키운 적이 없기에 사소한 일로 실의에 빠지지 않으려 했다. 얼마나 고마운 학교며 배움터였는가.

그시절 무교동엔 장안 최고의 나이트클럽으로 이름을 날리던 스타다스트가 위용을 자랑했다. 코파카바나가 이와 경쟁하며 쌍벽을 이뤘다. 무교동 골목길에 값싼 비지찌개와 돼지뼈 감자탕을 파는 허름한 음식점들이 많았다. 밤이면 대학생들은 물론 호주머니 알팍한 직장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이 몰려들어 찌게와 빈대떡 안주로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이 동네를 아지트로 삼았던 ‘청바지 문화의 전도사’들은 을지로 쪽에 붙은 샤모니 빵집의 싼 빵을 잊지 못한다. 설렁탕이 유명했던 한밭식당 옆 연다방은 대학생들이 즐겨찾던 명소였다. 가끔은 어른들이 주로 드나들던 무교동 안쪽 일번지 다방에도 진출하곤 했다.

그 무렵 ‘세시봉’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대학생의 밤’이라는 아마추어 장기자랑류 프로그램이 있다. 조영남을 비롯 연세대생 박상규, 윤형주, 이장희, 홍익대생 이상벽, ‘정체불명의 사나이’ 송창식이 그 무대에서 만나 우정을 키웠다. 이렇게 만난 그들은 의기투합되어 그 당시의 무교동의 새로운 문화를 이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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