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is / 2008년 2월 19일, 에디슨이 유성기 발명> ‘소리를 재생시키는 기계’의 탄생

Midlife Culture / 신성식 기자 / 2025-02-19 12:05:46
- '유성기' 하면 누구나 발명자 에디슨보다 '니퍼(Nipper)'라는 개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
- 소리를 내는 기계 ‘유성기’가 등장하자 당대인들은 ‘기계 속에 악마가 들어 있다’고 경악

 [스마트시니어뉴스=신성식 기자] 2022년 2월 19일은 오디오의 ‘공식’ 나이가 142살이 되는 의미 깊은 날이다. 1877년 7월 특허를 신청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8개월 만에 원통형 '틴포일' 유성기를 개발해 공식 등록시켰다. 그의 포노그래프는 소리를 사고팔고 소유할 수 있는 상품개념으로 바꾼 혁명적 발명품이었다.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유성기로 재생된 최초의 소리는 1877년 8월 12일 뉴저지 작업실에서 자신이 친구들과 함께 부른 동요 <메어리의 작은 양>(한국동요 <떴다 떴다 비행기>의 원곡)이었다. 소리를 내는 기계 ‘유성기’가 등장하자 당대인들은 ‘기계 속에 악마가 들어 있다’고 경악할 만큼 관심을 가졌다.

8년이 지난 1886년 5월 4일. 뒤늦게 연구에 뛰어든 그레이엄 벨이 운영한 볼타 연구소는 이전보다 개량된 포노그래프를 개발해 특허를 받아 에디슨에게 기술 합작개발을 제안을 했다. 자신의 기술이 도용되었다는 생각에 화가 난 에디슨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5일 만에 한 단계 진보한 유성기를 개발하는 집념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887년 이번엔 젊은 과학도 에밀 베를리너가 등장했다. 그는 에디슨을 능가하는 원반형 레코드를 제작해 '그라모폰'이란 이름으로 특허를 얻어냈고 1888년 깡통 형태로 2분 정도 재생 가능한 유성기로 더욱 진보시켰다.

 

이에 에디슨의 ‘포노그래프’와 베를리너의 ‘그래머폰’간에 기술 전쟁이 시작되었다. 1888년 7월 에디슨은 최초의 유성기 회사인 '북아메리칸 유성기 회사'를 설립해 유성기 재생소리의 개선을 위해 다이아몬드 디스크 포노그래프를 만들었고 베를리너는 빅터 토킹 컴퍼니(Victor Talking Co.)를 설립해 더욱 사용이 편리한 스프링 모터 형 유성기를 개발해냈다. 이때부터 레코드의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비로소 유성기의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유성기' 하면 누구나 발명자 에디슨보다 '니퍼(Nipper)'라는 개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너무도 유명한 사연은 이렇다. 1889년 영국의 풍경화가 프랜시스 바로는 에디슨의 원통형 축음기 나팔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는 자신의 애견 니퍼를 그린 그림을 들고 에디슨을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개 니퍼가 ‘죽은 형이 생전에 즐겨듣던 음악이 흘러나오면 어김없이 축음기 앞에서 형을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는 기막힌 사연과 더불어 '주인의 목소리(His master's Voice)'라는 제목을 붙인 자신의 그림을 포노그래프의 선전용으로 써달라고 제의했다.

 

하지만 에디슨은 '개가 무슨 음악을 듣느냐'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 바람에 바로는 그림 속의 원통형 에디슨 축음기를 그라모폰의 원반형 레코드로 고쳐 그려 100파운드에 넘기게 되었다. 1900년 영국 그라마폰 사를 방문한 에밀 베를리너는 개작된 그림을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직접 그린 개 그림을 의장등록을 해 빅터 사로 상표권을 넘겼다. 결국 니퍼는 RCA의 상징이 되어 전 세계 음악 애호가로부터 사랑받는 상표로 발전했다.
 
레코드 발명 초기의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당시 유성기는 마술 기계로 인식되어 성악가들은 거의 다 녹음을 거부했다. 1894년 그라모폰사(미국 RCA의 모체, 현재의 EMI)에 들어간 최초의 음반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1700개가 넘는 음반을 기획, 제작한 인물이다. 러시아의 오페라가수 샬리아핀은 대중을 매료시키는 마술적 힘을 가진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면 그 힘을 빼앗긴다고 생각해 끝까지 거절했다. 하지만 1901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잔을 권한 가이스버그의 러시아산 보드카에 무너져 첫 음반을 남겼다.

가이스버그의 두 번째 프로젝트는 저 유명한 테너 카루소였다. 이탈리아 밀라노 그랜드 호텔 306호에 묵고 있던 당시로서는 무명가수였던 카루소는 그의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호텔방에서 아리아 열곡을 녹음했다. 1902년 발매된 이 음반은 카루소의 음성이 담긴 가장 오래된 레코드로 알려져 있다. 다음 차례는 역사상 최후의 카스트라토인 알레산드로 모레스키였다. 그 음반은 음반 역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이처럼 가이스버그의 뛰어난 섭외능력은 당시 에디슨이 세운 포노그래프사와 라이벌 회사였던 그라모폰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포노그래프사는 하드웨어작 기술은 훌륭했지만 소프트웨어에 대한 마인드는 부족했다. 에디슨의 유성기로 들을 수 있는 음원은 무명가수의 노래나 코미디 녹음이 고작이었다. 당대 대중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 공연장에서나 들을 수 있던 유명 오페라 가수의 목소리가 녹음된 그라모폰사의 디스크에 열광하며 레코드 산업은 활황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하드웨어 발명에만 몰두한 에디슨의 포노그래프사는 1929년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국내 유성기에 관한 최초의 흔적은 놀랍게도 유성기 발명 25년후 인 1903년에 포착된다. 당시 미국 공사였던 선교사 앨런이 고종황제에게 에디슨의 포노그라프를 보여 주었다.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라는 설명에 황당했던 고종은 시험 삼아 경기명창 박춘재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영문도 모른 채 호출된 박춘재는 시원하게 ‘적벽가’의 한 대목을 목청껏 뽑아냈다. 잠시 후 앨런이 유성기를 틀자 방금 녹음된 그의 노래가 재생되어 흘러나왔다. 일순간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기절할 듯 놀란 박춘재는 그만 바지에 소변을 찔끔하고 말았다. 이를 본 고종은 배꼽이 빠져라 웃으며 “너의 수명이 10년은 감해졌겠구나!”하고 말해 ‘십년감수’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서양의 유성기가 들어오자 조선인들은 신기했지만 ‘귀신소리’라 여기며 겁을 먹고 멀리했다. 하지만 고관대작들 사이에 최고의 선물로 떠오르면서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며 급격하게 보급되었다. 이처럼 소리의 저장을 가능케 한 에디슨의 유성기는 동서양 모두에게 새로운 문화 문명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음악이라는 영원한 친구를 곁에 두고 언제든지 들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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