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권의 동화 속 마을 같은 동유럽 5개국 여행기/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 "체코의 숨겨진 보물"

Midlife Travel / 장권 / 2025-02-19 13:49:19

[스마트시니어뉴스=장권 여행 칼럼니스트] 우리의 1차 목적지인 체스키크룸로프(CHESKY KRUMLOV)에 12시 반경에 도착했다. 언덕 위에 절벽을 이용해 만든 성이 우릴 반긴다. 예까지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구시가지로 가서 토굴같이 생긴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여기서도 바벨성 앞 식당에서와 같이 빵으로 만든 그릇에 마늘 수프가 나온다. 오랜만에 맛보는 마늘 맛에 새삼 집이 그리워진다. 

마늘 수프 속으로 들어간 추억 한자락

나는 마늘 하면 단군신화의 호랑이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생각난다. 우리는 시골에 살면서 인근에서는 처음으로 특용작물을 재배했다. 지금은 특용작물 재배가 보편화되었고, 특용작물을 재배해야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1970년경에는 특용작물은 극히 일부 지역에서 일부의 사람들이 재배했다.

우리는 아버님께서 1965년경에 고추를 300평 정도 심었다. 그랬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무척 욕을 먹었다. 고추를 도대체 얼마나 많이 먹으려고 그렇게 많이 심었냐고 핀잔 듣기가 일쑤였다. 당시에는 대도시 근교를 제외하고는 자급자족할 정도만 심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고추를 판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때였기 때문이다.그런데 그해에 전국적으로 고추가 흉년이 들었고, 우리의 고추 농사는 풍년이 들었다. 고추를 말리느라고 방에도 널어놓았다. 우리는 잠을 자려면 고추를 한쪽으로 밀고 고추 속에서 잠을 잤을 정도였다.

 

아버님은 고추를 팔지 않고 겨울이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른 봄에 팔았다. 고추금이 비싼데도 팔지 않고 기다렸다가 팔았다. 가을보다 고추금을 무려 세배나 더 받고 팔았다. 고추를 판 돈으로 논을 닷 마지기나 샀다.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의 눈이 돌아가기 시작하여 너도나도 고추를 심었으나, 다음 해에는 과잉생산되어 고춧값이 폭락하고 말았다.

고추에 이어 마늘 농사에 도전
우리 집은 다시 마늘에 도전하였다. 마늘을 천 평을 심어 작황이 좋아 첫해 농사를 지어 마늘 판 돈으로 다시 논을 닷 마지기나 샀다. 1970년으로 기억되는데, 그해에 마늘값이 폭락하였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청주까지 마늘을 가져와 리어카에 싣고 다니시면서 직접 팔러 다니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인 셈이다. 이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청주에서 학교 다니고 있던 나는 어머니가 오셔서 너무 좋았다. 그러나 밖에서 노느라고 정신이 팔려 어머니가 리어카 행상을 하시는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다니실 때 뒤에서 밀어드렸으면 조금은 편하게 다니셨을 텐데. 이런 것도 지식이라고 학비 대주고 용돈 주시면서 키우셨으니,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잠시 상념에 젖어 있는데, 가이드가 체코 맥주가 맛있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한잔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황○○ 씨가 전부 맥주 한 잔씩을 돌려 잘 마셨다.

체코의 숨겨진 보물이자 필수코스인 체스키 크룸로프
체스키 크룸로프 도시는 12세기에 디텍 가문에서 처음 도시건설을 하였다. 후에 로즌베르그 가문에서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구시가지 광장의 규모는 작지만, 시청사 등 고건축물들이 사방을 메우고 있다. 시청사 벽면에는 EU기, 체코기, 로즌베르크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걸어놓고 있다. 로즌베르크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기를 시의 기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시청사 벽면에는 깃발 외에 각 가문의 문장을 새겨 놓아 옛날 이 시의 존재가 있게 해준 가문을 기리고 있다.


성과 구시가지 사이를 흐르는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 난간에는 왕비의 고해성사에 대한 내용을 묻는 왕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아 죽임을 당한 신부의 동상이 조금 훼손된 채로 서 있다. 반대편에는 예수의 동상이 역시 조금 훼손된 채 서 있다. 원래의 동상은 카를교에 있다고 하니 이따 저녁때 카를교에서 보자. 그런데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왕이 캐물었을까? 신부가 고해성사의 내용을 말하지 않는 것은 원래 말하면 안 되도록 되어 있으니 이해가 되지만, 왕이 끝까지 캐물은 것은 아마도 커다란 이유가 있을 것인데, 가이드가 더 이상은 모른다고 한다.

그 이유를 추측해 보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왕비의 외도 문제로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왕과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왕비가 다른 영주들과 힘을 합쳐 왕에게 대항하려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자는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첫 번째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곰이 살고 있는 도시
1077년에 건축되었던 중세의 건축물인 페스텅 호헨짤스부르크성(Festung Hohensalzburg)으로 들어가는 문을보니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음을 표시해 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조금 올라가니 곰이 살고 있는 곳이 나온다. 다리 아래에 곰이 산다고 하는데 다리 밑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는 이곳에 곰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근래에는 개발이라는 명목에 밀려 곰이 사라졌다. 이곳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곰이 다시 살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왔으면 이놈이 얼른 나와서 환영 인사를 해야 하는데 나타나질 않는다. 이곳에서는 예절교육도 가르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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