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is / 1989년 11월 9일,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하나 된 독일에서 보내는 思母曲

Midlife Culture / 신성식 기자 / 2024-11-09 19:14:56
- 그때 우린 너무 가난했어요. 같은 분단국가인데 이 나라 서독은 우리와 달리 왜 그렇게 잘 살던지, 부러웠습니다.

[스마트시니어뉴스=신성식 기자]  서독과 동독을 가로막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게 벌써 삼십 년이 지나갔다. 벽이 무너지던 날, 밤을 새워 저도 그곳에 있었어요, 어머니. 아이들이 주워온 벽돌 한 조각 손에 들고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가로막고 있는 휴전선이 벗겨지는 날에도 그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곳에서 철조망 한 가닥 주워와 이 벽돌 조각과 나란히 놓아두어도 좋겠다.’ 그런 생각을……. 그렇게 철조망이 뜯기면 여기에서 기차 타고 내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과 함께 꿈에도 그리운 내 고향에 갈 수 있겠죠? 그런데 어머니, 그곳엔 정말 철조망이 있긴 있는 건가요?

어머니, 그리운 내 어머니.
어머니, 그때 우린 너무 가난했어요. 같은 분단국가인데 이 나라 서독은 우리와 달리 왜 그렇게 잘 살던지, 부러웠습니다. 참말 부러웠습니다. 하나가 된 독일을 보며 그 부러움이 더했어요. 이렇게 나와 살다 보니,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게, 마치 제가 큰 애국자라도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 사무치게 그리운 내 어머니, 저는 이제 이곳 사람이 다 된 것 같아요. 제 아이들은 더 그렇고요. 자신들의 정체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그 아이들에게 이 어미의 고향, 이 어미의 어미 혼이 살아 숨쉬는 고향땅을 밟게 해 주고 싶어요. 뒷동산에 올라 진달래 꽃잎도 따 먹고, 넓적한 바위에 누워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도 보고, 토끼풀꽃으로 반지 만들어 손가락에 끼워도 보고……. 꼭 그렇게 해주고 싶습니다, 어머니.  


저, 이렇게 살았어요.
‘3년을 의무기간으로 하고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한국으로 송금해야한다’는 계약 조건을 걸고 이름도 생경한 나라 서독에 간호사로 온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40년이 훌쩍 넘었네요. 떠나올 때, 애써 당신 눈물 보지 않으려, 제 눈물도 보이지 않으려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어머니, 당신 쳐다보심을 제 어찌 느끼지 못했겠어요? 제 뒤꼭지에도 어머니마냥 눈이 달려 있다는 걸, 모르셨지요?

제가 처음 한 일은요, 이 나라 간호사들이 꺼려하는 아주 밑바닥 일이었어요. 한 번은 죽은 사람의 몸을 닦는데 어찌나 무섭고 서럽던지, 눈물 섞인 알코올로 주검을 닦기도 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요, 생김새 비슷한 사람 하나 없지요, 일은 또 어찌나 많던지……. 괴팍한 노인 환자에게 지팡이로 맞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래도 한국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입술을 깨물며 참았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같이 온 언니 동생들 모두 그렇게 지냈어요. 우리가 보내는 돈으로 동생들 공부시킬 수 있고, 나머지 가족들도 조금은 나은 삶을 살 거란 믿음으로 잠을 쫓아가며 살았습니다. 사실 작은 고추가 맵긴 매워요, 그렇죠, 어머니? 이런 우리를 무슨 벌레 보듯 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니 진심을 알아주더라고요. ‘한국 천사’라는 뜻의 코레아니쉐 엥겔이라 불러 주기도 하고……. 이런 웃지 못 할 일도 있었어요. 여기 사람들은 소뼈를 먹지 않더라고요. 해서 공짜로 얻기도 하고 아니면 아주 헐값에 사서 팍팍 고아 먹었습니다. 언감생심, 한국에선 구경도 못할 호강이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 어찌나 계산속이 밝던지, 우리가 ‘좋아라!’ 하는 걸 알고 단번에 값을 다락같이 올리더라고요.
이런 얘기가 술술 나오는 걸 보니 시간이 흐르긴 많이 흘렀네요, 어머니.
▲ photo - pixabay
이념의 벽을 넘어
그런데 어머니, 우리나라처럼 한 민족이면서 두 나라로 나뉜 곳에 살다 보니 이념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이 자꾸 터지더라고요. 당연한 일처럼 우리는 그때마다 조사를 받아야했고 또 몇몇은 귀국해야만 했지요.
누구누구가 알고 보니 간첩이었다더라, 아이고 무서워라, 설마 걔가? 그래, 어쩐지 좀 이상하게 보이더라니…….


 공산당을 얼굴 벌건 늑대쯤으로 교육받았던 우리에겐 너무나 무시무시한 일이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외모를 가지고 우리와 별반 다름없이 산다는 생각에 서로를 의심의 눈으로 쳐다 봐야했고, 한국 사람끼리 만나는 것조차 꺼려졌지요. 서로를 의심한다는 거, 정말 끔찍하고 무서웠습니다. 갖은 수모 속에서도 웃음 잃지 않고 똘똘 뭉쳐 서로를 위로하며 다독이며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시간이 지나니 사건의 진상도 밝혀지고 간첩으로 몰렸던 사람들의 명예도 회복되고……. 하지만 어머니, ‘세월이 약’이라는 노랫말로 아픔을 달래기엔 너무도 모자람이 많지 싶습니다.

▲ photo - pixabay
얼마 전 이수자 여사가 한국을 방문했다는 기사를 읽으니 뜬금없이 ‘하늘에서 윤이상 선생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게, 비단 저 뿐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지금, 이념이 사라지고 남겨진 베를린 장벽엔 예술가들의 그림과, 다녀간 많은 이들의 바람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글도 간간이 눈에 띕니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등등……. 장벽이 있었음을 표시해 놓은 선을 가운데 두고 한쪽 발은 동쪽에 다른 한쪽 발은 서쪽에 둔 채 東으로 西로 달리는 자동차와 사람들을 봅니다. 모두들 바삐 쉼 없이 움직입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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