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is / 1977년 11얼 11일, 전북 이리역 폭발사고> (故)이주일을 아십니까?

Midlife Culture / 신성식 기자 / 2024-11-11 19:21:11
- 민수용 화약을 싣고 광주로 향하던 화약 적재 열차가 이리역 하행선에 대기하다 화약이 터지면서
- 내 인생에 두 사람을 꼽으라면 하춘화와 축구감독 박종환이다

[스마트시니어뉴스=신성식 기자] 이리역 폭발사고가 나던 날, 당시 무명이었던 코미디언 故 이주일은 여가수 하춘화를 불길 속에서 구해냄으로서 다시 한 번 그의 희생정신과 따뜻한 인간미를 세상에 알렸다. 기억하기도 싫은 악몽의 이리역 폭발사고는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15분께 민수용 화약을 싣고 광주로 향하던 화약 적재 열차가 이리역 하행선에 대기하다 화약이 터지면서 이리시를 아비규환으로 만든 참변이다. 지금의 익산시로 바뀐 이리시는 당시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였다. 이 사고는 당시 사망 59명, 중경상 1343명, 이재민 1982세대 9973명의 희생자를 냄으로써 우리나라 최악의 폭발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40여톤의 폭약이 일시에 터지면서 현장에는 깊이 15m, 폭 40m의 큰 구덩이가 생겼으며 시는 전체 가구의 70%가 부서지는 등 폐허로 변했다.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이리시는 이 사고 이후 각계의 온정과 지원, 각고의 노력 등 만 2년간의 복구 작업을 펼친 끝에 재기에 성공했다. 오는 11월11일은 이리역 폭발사건 28주년 되는 날이다. 익산시는 이리역 폭발로 경제, 인구, 관광산업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그러나 익산은 이를 계기로 역 주변의 판잣집 등 무질서하게 형성되었던 시가지를 정비하고 도로망도 격자형 체계로 크게 바뀌었다. 이 사고는 익산의 도시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도시 발전에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지난 2004년 4월에 개통된 KTX는 교통과 물류 중심도시인 익산에 지역경제 활성화와 관광 사업에 있어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리역 폭발사고속의 하춘화와 이주일의 인연
이런 최악의 폭발사고의 현장에서 살아났던 우리나라 최고의 여가수 하춘화는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폭파사고로 자신의 두개골이 함몰된 경황 중에도 나를 업고 뛰어갔다며, 특히 벽을 넘을 때는 먼저 넘어간 이주일씨가 지신의 머리를 밟고 내려오라고까지 했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

 

암으로 타계하기 전, 故 이주일은 "나는 15세 연하인 그녀를 공주님처럼 모셨다. 지역 깡패들이 그녀에게 접근하려면 우선 나부터 상대해야 했다. 이리역 폭발사고 때 나는 머리가 깨진 상태에서도 그녀부터 찾았다. 내 인생에 두 사람을 꼽으라면 하춘화와 축구감독 박종환이다."라고 회상하기도 했었다.

故 이주일이 1970년대 최고의 인기스타 하춘화를 만난 것은 1974년. 고인은 당시 지방유랑 극단에 몸을 맡긴 채 충무로 언저리를 기웃거릴 때였다. 물론 70년대 말 "일단 한번 와보시라니까요“와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로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오르기 훨씬 전의 일이다.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고인의 생생한 증언.'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극장 지붕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하춘화부터 찾았다. 불길이 치솟는 난로 옆에 그녀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나도 머리에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지만 무조건 그녀를 업고 뛰었다. 그녀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쓰러졌다. 이때 14명이 죽었고 나는 뒷머리가 함몰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가수 하춘화 씨는 1977년 당시 인기 톱가수였고 고 이주일 씨는 당시 유랑 악극단의 무명 MC이자 코미디언이었다. 그런데 근처 이리역에 갑자기 폭발이 나는 바람에 사고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주일은 톱 가수가 죽으면 쇼가 진행이 되지 않으며 주인공이 빠진다는 생각에 그녀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하춘화를 불길 속에서 구해낸 아이러니한 사건이 지금까지 연예계의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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