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 박정하 일상과생각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09-01 08:16:55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지난 5월, 아프가니스탄 출신 미국인 의사이자 작가인 할레드 호세이니의 데뷔작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의 인연으로 최근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A Thousand Splendid Suns)>을 읽었다. 570쪽에 가까운 만만치 않은 분량에 글씨까지 작아 눈의 피로도 꽤 있었지만, 일주일쯤 책을 붙들고 있다가 오늘에야 마지막 장을 넘겼다. 책장을 덮고 나니 이상하게도 소설의 줄거리보다 먼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마침 이 책을 읽는 동안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조금은 역설적인 이야기도 접했다.
2021년 8월 미군이 철수하자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장악했고, 다시 탈레반 정권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오히려 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위험한 지역을 찾아다니는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이나 극단적인 여행을 즐기는 유튜버와 외국인 남성 관광객들이 꽤나 많이들 이 낯선 나라를 찾고 있다고 한다. 한편 탈레반 당국은 관광을 외화 수입과 대외 이미지 개선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듯하다. 카불에서는 관광과 호텔 서비스 인력을 교육하는 기관도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참 묘한 일이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전쟁과 억압의 기억이 선명하고 여성들의 삶을 제한하는 현실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땅을 ‘여행할 수 있는 곳’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니.

앞서 읽었던 <연을 쫓는 아이>가 아버지와 아들, 남성 사이의 죄책감과 구원을 이야기했다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전쟁과 폭력의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붙잡아 주었던 두 여성, 마리암과 라이라의 이야기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두 사람이다. 하지만 폭력적인 남편과 전쟁이라는 잔혹한 현실 앞에서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어머니가 되고, 자매가 되고, 끝내는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 간다.
나는 소설 속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해가는 과정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소설의 제목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17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사이브 에 타브리지'의 카불에 관한 시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호세이니는 카불을 떠나야 하는 한 인물의 심정을 표현할 시를 찾다가 이 구절을 발견했고, 그 가운데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라는 표현을 제목으로 삼았다고 설명한다.
시 속에서 그 태양들은 카불의 담장 뒤에 숨어 있다. 나는 책을 읽기 전 그 태양이 카불의 풍경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태양은 오히려 마리암과 라이라 같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기억되지 않을 것 같은 삶. 역사의 기록에는 남지 않을 삶.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름조차 불리지 않을 수 있는 삶. 그런데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며, 누군가의 내일을 위해 자신의 오늘을 견뎌낸 사람들. 그들의 삶이야말로 어쩌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아니었을까.
역사책은 늘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정복자와 장군, 정치인의 이름은 또렷하게 기록되지만, 포화 속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밤을 견딘 사람들, 굶주린 가족을 위해 제 몫을 내어준 사람들의 이름은 좀처럼 남지 않는다. 그러나 한 인간의 생애에서 진정 숭고한 역사는 어쩌면 이런 기록되지 않은 무명의 삶들이 이어온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슬픔을 알아채는 것.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 내가 가진 것을 조금 나누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된 구원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조차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밝히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 같은 자리에서 누군가의 삶을 지켜준 사람들. 그들이 있는 곳에 태양은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그런 태양이 수없이 숨어 있을 것이다.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보이지 않을 뿐.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도 이 책의 잔향이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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