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소리는 의미보다 먼저 도착한다
- 박정하 일상과생각 / 박정하 칼럼니스트 / 2026-08-24 18:33:03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요즘 고등학교 과정에 음악 수업이 제대로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설령 있다 해도 그 시간을 수능을 대비한 자습 시간으로 활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창 정서적인 교육이 필요한 나이에 음악 한 시간조차 입시를 위한 시간으로 바뀌어버린 현실이 안타깝다.
독일 예술가곡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곡가는 아마 슈베르트와 슈만, 브람스일 것이다. 조금 더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들보다 앞선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모차르트의 「제비꽃(Das Veilchen)」이나 베토벤의 「입맞춤(Der Kuss)」, 「아델라이데(Adelaide)」 같은 곡을 들어보면 이들이 고전파 시대의 작곡가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된다. 특히 베토벤의 「아델라이데」에는 훗날 낭만주의 가곡에서 만나는 정서가 이미 짙게 배어 있다.

그런데 독일가곡을 생각할 때 나는 일전에 썼던 한 문장이 다시 떠오른다.
“소리는 의미보다 먼저 도착한다.”
독일어 가사의 뜻을 모른다고 해서 슈베르트의 「보리수」가 지닌 아름다움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브람스의 「자장가」가 주는 따뜻함 역시 독일어 문장을 하나하나 해석해야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베토벤의 「아델라이데」를 들을 때도 연인의 이름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듯한 선율이 먼저 가슴에 와닿는다. 음악은 때로 그렇게 언어보다 먼저 사람에게 도착한다. 그런 생각을 또 하게 된 것은 어제 독일가곡 콩쿠르 심사를 다녀오면서 특별히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다.

어제 심사를 하는 동안 특별히 대학·일반부 남자 출전자들의 노래를 들으며 오랜만에 참여한 심사라서 그랬는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격세지감과 뿌듯함을 느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젊은이들이 많아 나는 적잖이 놀랐다. 체격도 좋았고 무엇보다 앞선 세대와는 목소리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참가자 거의 모두가 클래식 음악의 본토라 할 수 있는 유럽 무대에 세워놓아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만한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20대 초·중반 젊은이들은 성장 환경부터 달라졌다. 먹는 것이 달라졌고 체격이 달라졌으며, 그에 따라 성악가에게 중요한 신체적 조건과 목소리의 물성도 달라졌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좋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독일어 딕션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고, 곡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표현에도 자기 나름의 해석이 훌륭했다.

독일가곡의 아름다움에는 극적인 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음을 길게 이어가며 만들어내는 선율의 아름다움, 한 단어를 어떻게 호흡하고 어떻게 감싸는가에서 오는 섬세함, 그리고 시와 음악이 서로 기대어 만들어내는 여백 역시 독일가곡의 중요한 매력이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잠시. 그 어렵고 난해한 곡들을 어쩌면 그렇게 잘 소화하며 부르는지. 딕션에서부터 곡의 해석과 표현까지 듣고 있자니, 이 정도라면 지금 당장 유럽의 국제 콩쿠르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느낌을 준 연주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심사위원 입장에서는 또 다른 어려움이 생겼다.
이렇게 잘하는 출전자들을 두고 어떻게 1, 2, 3등으로만 나눌 것인가. 물론 콩쿠르이니 순위를 정해야 하는 것이 심사위원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앉아 젊은 성악가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순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재능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콩쿠르장을 나오면서 문득 우리에게 정말 인재가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노래할 무대가 부족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중간의 무대가 너무 적다. 매년 뛰어난 성악 전공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오고, 국제 콩쿠르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노래하면서 자기 음악을 만들어갈 수 있는 무대는 그 숫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얼마 전 가수 이문세 님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성악을 전공한 젊은 음악가들이 크로스오버 음악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쓰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왜 성악을 전공한 젊은이들은 꼭 정해진 몇 개의 무대에서만 살아남아야 할까. 오페라 무대도 좋고, 독일가곡 무대도 좋고, 크로스오버도 좋다. 작은 음악회도 좋고, 지역의 공연장도 좋고, 조금 더 대중적인 무대도 좋다. 노래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무대가 아닐까.
어제 콩쿠르장에서 들었던 젊은 성악도들의 목소리는 내게 꽤 큰 기쁨이었다. 우리 세대보다 훨씬 좋은 신체적 조건을 가진 젊은이들, 유럽이나 미국의 음악가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목소리를 가진 젊은이들, 그리고 이제는 그 좋은 재료를 음악으로 표현해낼 줄 아는 젊은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그 많은 재능이 콩쿠르장의 몇 분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이 목적이 아니라 상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도 계속 노래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그래야 오늘의 콩쿠르가 내일의 무대로 이어질 테니까.
어제 그 젊은 성악도들의 노래를 들으며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 '소리는 의미보다 먼저 도착한다' 는 말. 선배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렇게 먼저 도착한 소리가 오래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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