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ro / 음악다방과 DJ, DJ 어원은 Disk(음반)와 Jockey(말을 타는 기수)의 약자
- Midlife Culture / 조용수 기자 / 2025-10-15 22:39:15
차곡차곡 한 켠에 LP판들이 서로의 차례를 기다리고, DJ는 리퀘스트 뮤직의 사연들을 읽어가며 음악을 둘려주던 음악다방이라는 문화는 정치적이던 문화적이던 한때 우리들에게 익숙했었지만 지금은 그저 추억으로만 남는 ‘기억’이 되어 버렸다.
커피와 음악다방
우리나라에서 커피는 60~70년대에 들어와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었다. 그 와중에 음악다방도 새로운 문화의 장소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50년대 말 명동에 위치한 음악다방 ‘은하수’, ‘명보다방’, ‘돌체’ 등은 젊은이들을 위한 자리로 유명했었다. 그리고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디쉐네’, ‘메트로’, ‘시보네’ 등도 명소로 자리 잡아갔다. 이 시기를 통하여 최동욱, 이종환, 김인권, 박광희, 원종관, 조용호, 이백천, 이선권, 박원웅 등이 DJ로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후일 방송사가 생기면서 이들은 각각 프로듀서나 방송 DJ로 자리를 옮겼다. 그만큼 그들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증거다. 어쨌든 이런 음악다방을 중심으로 커피는 젊은이들의 문화의 기호품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LP판, 장발, 미니스커트, 고고, 디스코, 팝송과 더불어 커피는 더더욱 빠른 속도로 번져갔다.
70~80년대 음악다방을 한 번 살펴보자. 1970년대 초 커피 값은 60원이었다. 아마 자장면 가격도 이 정도였을 것이다. 음악다방은 마땅히 갈 곳 없고 호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았던 대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였다. 장발이 유행하던 그 시절, 뒷주머니에 도끼빗을 넣고 다니며 거울 앞에서 뽐내며 머리를 빗는 DJ의 모습 또한 참 익숙한 풍경이었다.
서대문, 신촌의 ‘독수리다방’, ‘빌보드’, ‘파리다방’, ‘상록수다방’, ‘성지다방’, ‘참피온다방’, ‘노라노다방’, ‘타임다방’ 고대 앞에는 ‘보성다방’, ‘서브웨이’ 경희대 입구에는 ‘궁다방’, ‘상원다방’ 신당동의 ‘너와나’, ‘주희다방’ 화양리의 ‘매킨토시’, ‘타임다방’이 있었고 동대문인근에는 ‘못잊어다방’, ‘돌체다방’, ‘선구자다방’, ‘수산다방’, ‘청자다방’, ‘산울림’, ‘금성다방’, 동궁다방‘, ’역마차‘, ’청춘스케치‘ 등이 있었고, 청량리에는 ‘남지다방’, ‘지하철다방’, ‘동산다방’ 왕십리에는 ‘축제다방’, ‘돌체다방’, ‘약속다방’, ‘불새다방’ 영등포 지역에는 ‘꽃샘다방’, ‘약속다방’, ‘종점다방’ 그리고 강남 신사동에는 ‘영일다방’, ‘타임다방’, ‘로마의 휴일’ 등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음악다방을 출입했던 당시의 젊은이들은 무슨 사고를 가지고 있었을까? 1970년대는 자본주의 성장으로 대한민국은 급속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치를 비롯한 문화 예술은 여전히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밑으로부터의 저항은 끊임없이 시작되었다. 예를 들면 사랑일변도의 가요 가사가 어딘지 모르게 저항운동으로 변하고, 화가들의 그림이 그렇고 시인과 소설가들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배자의 표현으로는 이들이 저속, 저질로 보였지만, 아무튼 거대한 권력적 자본주의의 수레바퀴에 매몰되어 있는 실정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곳이 바로 음악다방이었고, 젊은이들로 시작된 밑으로부터의 작은 반란이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음악다방 나름대로의 낭만도 있었고 러브스토리도 있었다. 그 중심에는 DJ가 있었다. DJ의 어원은 Disk(음반)와 Jockey(말을 타는 기수)의 약자로 말(馬)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수처럼 Disk(음반)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DJ는 뮤직박스 안에서 날씨와 계절, 분위기에 맞는 선곡을 하고 음악적인 주제와 화제의 멘트를 하는데, 주로 고객의 신청곡과 사연들을 위주로 방송을 했다. 가난한 연인들이 이곳을 찾아 그들만의 사연이 담긴 음악을 듣고, 혹은 군대 영장을 받은 젊은이들은 ‘꺼이꺼이’ 쓰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애창곡을 신청했고, 실연한 여대생은 마냥 눈물지우며 음악을 신청했었다. 아무튼 당시 음악다방은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한 좋은 휴식처였다. 일상의 피로에 지치고, 고향을 떠나온 외로움 .또 사랑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DJ는 신청곡과 사연을 전하며, 힘과 용기, 그리고 위안을 준 아름다운 메신저였다.
이렇게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도시의 대학가와 중심가에 유행처럼 번진 음악다방도 그 수명을 다하게 된다. 바로 86년 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때문이다. 그 이유는 1980년대에 새롭게 시작된 컬러 TV방송과 프로 스포츠의 열기와 각 가정의 오디오 보급과 다양한 여가문화(노래방, 게임방 등)의 출현으로 젊은이들의 시선이 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물질적 이유보다는 문화적 정치적 이유도 큰 몫을 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는 우리의 젊은이들은 다양한 사고를 가질 수 있었다. 6~70년대의 젊은이보다 그들은 물질적 풍부함을 떠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주화를 경험했고 자유가 진정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성장의 이면을 헤집고 들어가다 보면 아직도 정치적 문화적 부패와 비민주화를 얼마든지 느낄 수 있지만 6~70년대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차이라는 것이다. 통일문화재단의 서기원 목사(71세)는 이런 현상에 대해 “폴란드는 2차 대전 이후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다른 중동부 유럽 어느 국가보다도 활발하게 자유 민주주의 민족저항 운동이 이어졌습니다. 1956년 포즈나인 봉기를 시발점으로 하여 1968년 학생운동. 특히 1989년 폴란드 국민들의 대공산 정부와 대 소련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은 폴란드 사회주의 체제뿐만 아니라 소련의 중, 동부 유럽 지배체제 전체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자유민주화 운동과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은 우리 사회를 180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맥락으로 보시면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음악다방이라는 문화는 정치적이던 문화적이던 한때 우리들에게 익숙했었지만 지금은 그저 추억으로만 남는 ‘기억’이 되어 버렸다.
커피와 음악다방
우리나라에서 커피는 60~70년대에 들어와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었다. 그 와중에 음악다방도 새로운 문화의 장소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50년대 말 명동에 위치한 음악다방 ‘은하수’, ‘명보다방’, ‘돌체’ 등은 젊은이들을 위한 자리로 유명했었다. 그리고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디쉐네’, ‘메트로’, ‘시보네’ 등도 명소로 자리 잡아갔다. 이 시기를 통하여 최동욱, 이종환, 김인권, 박광희, 원종관, 조용호, 이백천, 이선권, 박원웅 등이 DJ로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후일 방송사가 생기면서 이들은 각각 프로듀서나 방송 DJ로 자리를 옮겼다. 그만큼 그들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증거다. 어쨌든 이런 음악다방을 중심으로 커피는 젊은이들의 문화의 기호품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LP판, 장발, 미니스커트, 고고, 디스코, 팝송과 더불어 커피는 더더욱 빠른 속도로 번져갔다.
70~80년대 음악다방을 한 번 살펴보자. 1970년대 초 커피 값은 60원이었다. 아마 자장면 가격도 이 정도였을 것이다. 음악다방은 마땅히 갈 곳 없고 호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았던 대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였다. 장발이 유행하던 그 시절, 뒷주머니에 도끼빗을 넣고 다니며 거울 앞에서 뽐내며 머리를 빗는 DJ의 모습 또한 참 익숙한 풍경이었다.
서대문, 신촌의 ‘독수리다방’, ‘빌보드’, ‘파리다방’, ‘상록수다방’, ‘성지다방’, ‘참피온다방’, ‘노라노다방’, ‘타임다방’ 고대 앞에는 ‘보성다방’, ‘서브웨이’ 경희대 입구에는 ‘궁다방’, ‘상원다방’ 신당동의 ‘너와나’, ‘주희다방’ 화양리의 ‘매킨토시’, ‘타임다방’이 있었고 동대문인근에는 ‘못잊어다방’, ‘돌체다방’, ‘선구자다방’, ‘수산다방’, ‘청자다방’, ‘산울림’, ‘금성다방’, 동궁다방‘, ’역마차‘, ’청춘스케치‘ 등이 있었고, 청량리에는 ‘남지다방’, ‘지하철다방’, ‘동산다방’ 왕십리에는 ‘축제다방’, ‘돌체다방’, ‘약속다방’, ‘불새다방’ 영등포 지역에는 ‘꽃샘다방’, ‘약속다방’, ‘종점다방’ 그리고 강남 신사동에는 ‘영일다방’, ‘타임다방’, ‘로마의 휴일’ 등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음악다방을 출입했던 당시의 젊은이들은 무슨 사고를 가지고 있었을까? 1970년대는 자본주의 성장으로 대한민국은 급속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치를 비롯한 문화 예술은 여전히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밑으로부터의 저항은 끊임없이 시작되었다. 예를 들면 사랑일변도의 가요 가사가 어딘지 모르게 저항운동으로 변하고, 화가들의 그림이 그렇고 시인과 소설가들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배자의 표현으로는 이들이 저속, 저질로 보였지만, 아무튼 거대한 권력적 자본주의의 수레바퀴에 매몰되어 있는 실정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곳이 바로 음악다방이었고, 젊은이들로 시작된 밑으로부터의 작은 반란이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음악다방 나름대로의 낭만도 있었고 러브스토리도 있었다. 그 중심에는 DJ가 있었다. DJ의 어원은 Disk(음반)와 Jockey(말을 타는 기수)의 약자로 말(馬)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수처럼 Disk(음반)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DJ는 뮤직박스 안에서 날씨와 계절, 분위기에 맞는 선곡을 하고 음악적인 주제와 화제의 멘트를 하는데, 주로 고객의 신청곡과 사연들을 위주로 방송을 했다. 가난한 연인들이 이곳을 찾아 그들만의 사연이 담긴 음악을 듣고, 혹은 군대 영장을 받은 젊은이들은 ‘꺼이꺼이’ 쓰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애창곡을 신청했고, 실연한 여대생은 마냥 눈물지우며 음악을 신청했었다. 아무튼 당시 음악다방은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한 좋은 휴식처였다. 일상의 피로에 지치고, 고향을 떠나온 외로움 .또 사랑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DJ는 신청곡과 사연을 전하며, 힘과 용기, 그리고 위안을 준 아름다운 메신저였다.
이렇게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도시의 대학가와 중심가에 유행처럼 번진 음악다방도 그 수명을 다하게 된다. 바로 86년 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때문이다. 그 이유는 1980년대에 새롭게 시작된 컬러 TV방송과 프로 스포츠의 열기와 각 가정의 오디오 보급과 다양한 여가문화(노래방, 게임방 등)의 출현으로 젊은이들의 시선이 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물질적 이유보다는 문화적 정치적 이유도 큰 몫을 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는 우리의 젊은이들은 다양한 사고를 가질 수 있었다. 6~70년대의 젊은이보다 그들은 물질적 풍부함을 떠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주화를 경험했고 자유가 진정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성장의 이면을 헤집고 들어가다 보면 아직도 정치적 문화적 부패와 비민주화를 얼마든지 느낄 수 있지만 6~70년대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차이라는 것이다. 통일문화재단의 서기원 목사(71세)는 이런 현상에 대해 “폴란드는 2차 대전 이후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다른 중동부 유럽 어느 국가보다도 활발하게 자유 민주주의 민족저항 운동이 이어졌습니다. 1956년 포즈나인 봉기를 시발점으로 하여 1968년 학생운동. 특히 1989년 폴란드 국민들의 대공산 정부와 대 소련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은 폴란드 사회주의 체제뿐만 아니라 소련의 중, 동부 유럽 지배체제 전체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자유민주화 운동과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은 우리 사회를 180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맥락으로 보시면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음악다방이라는 문화는 정치적이던 문화적이던 한때 우리들에게 익숙했었지만 지금은 그저 추억으로만 남는 ‘기억’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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